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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경 Jan 03. 2022

오쿠다 사진관 (1)

이훈우의 사무소, 윤심덕의 거처

성악가이자 가수, 배우였던 윤심덕과 연극인 김우진이 현해탄을 건너던 배 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는 소식이 경성 거리에 퍼져나가던 1926년 8월, 윤심덕이 살던 방에 신문기자가 들이닥쳤다. 윤심덕은 수은동(지금의 묘동) 60번지 오쿠다(奧田) 사진관 건물 2층의 다다미 깔린 일본식 방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녀의 방에는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사진을 비롯하여 두어 장의 유화와 수채화가 걸려 있었다. 기자는 이러한 그림들이 윤심덕의 '예술 애호자의 심중을 생각케' 한다고 적었다. 머리맡에는 축음기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때아닌 털외투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취재를 위해 망자의 빈 방에 들이닥쳐 사진을 찍은 기자의 행동은 경악스럽지만, 공교롭게도 그 행동으로 인해 우리는 윤심덕이 살았던 방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일보》 1926년 8월 5일자 기사에 실린 윤심덕의 방 모습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한 명의 예술가의 거처였던 오쿠다 사진관 건물은 어떤 곳이었을까? 1912년에 측량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수은동 60번지인 오쿠다 사진관은 단성사 부근에 위치하였다. 현대의 서울 지도로 해당 위치를 찾아보면 서울 종로구 돈화문로 32-1(묘동 61)로 지금은 우신빌딩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도 해당 위치의 지번이 61번지로 되어 있지만, 1912년 당시 수은동 60번지와 61번지의 소유자로 등록되어 있는 사람은 오쿠다 가즈요시(奧田一義)였고, 경성부 수은정 60 외 1필지의 구등기부에는 1916년 6월 27일, 토지조사의 결과 부지 번호 변경이 접수되었는데, 그 등기 표시에 수은정 60번지와 61번지가 나란히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오쿠다 사진관 건물은 두 지번에 걸쳐 세워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고, 나중에 서술하겠지만 경우에 따라 60번지라고 불리기도 하고 61번지라고 기록되기도 하였다.

1912년 지적원도의 일부. 빨간 글씨는 1927년 경성 전화번호부(사이토 마코토 기념관 소장)에 기재된 인물, 점포, 기관 명칭을 기록한 것.
빨간 동그라미를 친 부분이 돈화문로 32-1. 옆의 골목길은 1912년 지적원도에 나온 길과 거의 일치한다. (카카오맵 사용)

구등기부에 기록된 건물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건평은 15평 8홉 1작(약 52㎡)이며, 3층으로 된 목조 함석지붕 및 유리지붕 건축물 1동이다. 건물 지붕은 함석으로 되어 있는 가운데 3평(약 10㎡)은 유리지붕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사진관으로 사용되는 건물로서 자연 채광을 얻기 위한 구조인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의 사진관은 햇빛을 들이기 위해 지붕을 유리로 만들었고, 경성에 우박이 내릴 때 사진관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오쿠다 사진관이 언제부터 영업을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건물이 세워질 때부터 유리지붕을 만들어 사진관으로서의 활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건물이 완공되었던 1910년대에는 이미 사진관으로 영업 중이었을 것이다. 《동아일보》 1928년 8월 9일자 광고에 따르면 '사진과 당구 오쿠다'라고 하여, 오쿠다 사진관은 사진뿐만 아니라 당구장도 겸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광고에 실린 전화번호 광화문국 2196번을 1927년 경성 전화번호부에서 찾아보면, 그 명의가 오쿠다 가즈요시(수은동 60)로 되어 있다. 즉, 수은동 60번지와 61번지의 소유자인 오쿠다 가즈요시가 오쿠다 사진관의 대표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사진관 건물의 3층은 건평이 9평 6홉 1작(약 32㎡)으로, 1층과 2층에 비해 약간 면적이 좁아진다.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것은 바로 건축가 이훈우의 건축사무소인 '이훈우건축공무소'였다. 《조선일보》 1920년 12월 16일 <이기수 개업> 기사에 따르면 이훈우는 12월 10일부터 '부내 수은동 오쿠다 사진관 윗층에 영업소를' 정하였다고 하며, 《동아일보》 1921년 3월 18일자 이훈우건축공무소 개업 광고에는 그 주소가 '오쿠다 사진관 3층 누상(樓上) 임시사무소'라고 되어 있다. 또한 『개벽』 16호(1921년 10월)에 실린 광고에는 '경성 수은동 61 오쿠다 사진관 윗층'으로 되어 있다. 이상의 기사와 광고들을 통해 이훈우건축공무소는 오쿠다 사진관 3층에 사무소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1921년 3월 18일자 이훈우건축공무소 개업 광고

그런데 《조선일보》 1929년 5월 14일자 '인사소식'란에는 건축설계사 이훈우가 사무소를 '수은동 60으로 이전'했다고 적혀 있다. 처음부터 오쿠다 사진관에 사무소를 두었다면 수은동 60번지로 이전했다고 적지는 않았을텐데, 1921년부터 1929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일시적으로 사무소를 이전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훈우는 손자 성희가 태어난 1926년 이후에 고향 하동으로 내려가 한옥을 짓고 거주했다는 후손의 증언이 사무소의 이전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윤심덕은 1926년 2월에 극단 토월회를 탈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쿠다 사진관에 하숙방을 얻어 들어갔다. 이훈우가 1920년부터 줄곧 오쿠다 사진관에 사무소를 두고 있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만약 1926년 당시 이훈우건축공무소가 여전히 3층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같은 건물 2층에는 윤심덕이 살고 있었던 것이 된다. 윤심덕은 이 방에 머무르면서 라디오 방송과 레코드에 노래를 불러 넣는 것으로 직업을 삼고 있었으며, 김우진과 윤심덕이 오쿠다 사진관 건물에서 간간이 만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이훈우는 출근길에 윤심덕과 마주치거나 할 수 있었을까?


윤심덕이 죽기 직전 오사카로 레코드 취입을 위해 건너갔을 때 방안에 있는 세간들은 모조리 묶어서 오쿠다 사진관 주인, 즉 오쿠다 가즈요시에게 맡기고 갔다고 하며, 일본에서 윤심덕이 오쿠다에게 보낸 편지에는 '나는 친구의 집에서 놀다 간다', '방세는 최XX 씨가 전할 터이니 그리 알아주시오'라고 적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윤심덕이 이미 마음을 정리했던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윤심덕을 잘 아는 이철(李哲)이라는 인물은 윤심덕이 일본에 가서 주인집에 편지를 할 때도 그저 낙관적으로 '미야게'(선물)를 많이 사가지고 간다는 등의 말만 있었다고 하며 자살한 것은 뜻밖이라고 여겼다. 윤심덕의 마음은 이제 와서는 알 길이 없으나, 윤심덕이 이처럼 오쿠다 가즈요시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리고 같은 해, 오쿠다 사진관 2층에는 또 다른 예술인 한 명이 하숙을 하러 들어왔다.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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