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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경 Sep 18. 2021

이훈우의 서울살이(補)

구등기부와 제적부를 활용하다

지난번에 올린 글 <이훈우의 서울살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확인, 추정하였다.


* 이은우는 1912년 11월 30일 당시 익선동 75번지를 소유, 1913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하동으로 낙향

* 1911년에 귀국한 것으로 보이는 이훈우는 1912~13년에 이은우의 익선동 집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음

* 이훈우는 1925년 8월 당시 경성부 운니동에 거주

* 1927년 10월 기준 전화번호부에 따르면 집 주소는 운니동 70번지

* 1932년 당시 조카 이상경의 집 주소가 운니동 70번지로 이훈우와 같음

* 1934년 전화번호부에 이훈우의 전화번호 없음. 1934~37년 사이에 운니동 집 주인 바뀐 것으로 추정


그런데 최근에 익선동 75번지와 운니동 70번지에 대한 구등기부, 폐쇄등기부를 발급받았고, 이훈우의 후손으로부터 이상금(이훈우의 아들) 제적에 대한 정보도 제공받았다. 이 자료들을 통하여 이훈우의 경성에서의 삶을 보다 구체적으로 재구성해볼 수 있을 것 같아 글로써 정리해 본다.


먼저 1910년대 초에 이훈우가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큰형 이은우의 집에 대하여. 경성부 익선동 75번지 토지등기부에 따르면, 이은우는 1911년 4월 11일에 해당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당시 이은우의 주소는 경성부 중부 정선방 이동(泥洞) 77통 5호로 되어 있는데 이 주소는 행정구역 개편 전의 주소로, 익선동 75번지와 같은 곳이다. 1915년 9월 2일, 등기 명의인 이은우의 주소가 경성부 경운동 23번지로 변경되었고, 1917년 1월 27일에는 다른 이에게 익선동 75번지의 소유권이 넘어갔다. 따라서 이은우의 익선동 소유 시기는 1911년 4월~1917년 1월, 거주 시기는 1911년 4월~1915년 9월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훈우가 1911년 귀국 직후에 이은우의 집에 신세를 지는 것은 물론, 1915년 조선총독부 영선과에 근무하게 되었을 때도 이은우의 익선동 집(1915년 이후에는 경운동 23번지)이 아직 있었다면 여기에 살면서 출근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번에는 운니동 70번지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경성부 운니동 70번지의 토지등기부를 보면, 이훈우가 운니동 70번지 땅을 매입한 것은 1922년 12월 25일의 일이었다. 당시 주소지도 경성부 운니동 70번지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땅과 더불어 해당 대지의 건물도 매입하였고 그 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훈우는 1934년 9월 27일에 조병숙이라는 인물에게 해당 토지를 팔았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1936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옮겨진 경성부 운니정 70번지의 건물등기부는 현재 확인이 가능하다. 이 건물등기부에서도 조병숙이 1934년 9월 27일에 건물을 매입하고 있으므로, 이훈우가 1922~34년 사이에 건물과 토지를 소유하고 여기에 거주하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1936년 건물등기부 표제부의 건물 표시에 따르면, 1927년 3월 31일에 접수된 운니동 70번지의 건물들은 목조 기와집 1동(건평 14.8평)과 부속 건물인 목조 기와집 창고 1동(건평 3.74평)이었다. 원래 있던 목조 기와집 1동의 일부를 해체하여 건평이 변경되었고 부속건물이 신축되었기 때문에 등기 사항이 변경되었던 것이다. 1927년의 운니동 집 개조와 부속건물 신축에는 아마 당시 거주인인 이훈우가 깊이 관여했으리라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이때의 건물들은 소유주가 조병숙으로 바뀐 뒤 1936년 12월 2일에 철거되고 말았다.


한편, 이상금의 제적에는, 1935년 10월 18일 전(前) 호주인 이훈우의 사망으로 인해 이상금에게 호주 상속이 이루어졌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 사망일은 경주 이씨 백사공파 족보에 적힌 이훈우의 사망일인 1937년 음력 9월 20일과 2년 정도 차이가 난다. 그리고 이훈우의 둘째 아들 이상갑은 1934년 11월 24일에 하동군 악양면 입석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어, 역시 1934년 9월에 운니동 70번지 집을 처분한 이훈우가 하동으로 내려왔고, 아들 상갑은 하동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이훈우의 경성에서의 생활 타임라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11년: 이훈우 귀국

1915년: 조선총독부 영선과 근무. 이은우의 익선동 집 또는 경운동 집에서 거처?

1917년: 이은우가 익선동 집 매각(1/27), 이훈우는 조선총독부 기수에 임명됨(12/31)

1920년: 조선총독부 기수직을 그만두고 건축사무소 개업

1922년: 운니동 70번지 집을 구매

1927년: 집을 일부 개조. 부속 건물 1동 신축

1934년: 운니동 집을 매각. 아들 상갑 하동군 악양면에서 출생

1935년: 이훈우 하동에서 사망

1936년: 이훈우가 살던 운니동 집 건물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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