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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경 Aug 18. 2021

이훈우의 서울살이

이훈우(李醺雨)의 큰형 이은우(李恩雨)는 1909년에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전문부 경제과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같은해 10월에는 대한제국 궁내부 시종원 사무에 촉탁되었다. 또한 1910년 4월에는 보성전문학교의 법률 강사로 취임하였다. 한국병합이 일어난 뒤에도 이은우는 이왕직(李王職) 찬시(贊侍)에 임명되어 시종 역할을 계속 수행하였다. 1913년 3월 말에 그는 이왕직 찬시직에서 물러났고, 보성전문학교 법률 강사도 퇴직하였다. 이처럼 한국으로 돌아와 시종, 찬시와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근무하였던 이은우는 직업 관계 상 한성(경성)에 생활의 터전을 마련했을 것이다.


1912년에 조사, 기재된 경성부 중부 익선동의 토지조사부에 따르면, 다이쇼 원년(1912) 11월 30일에 신고된 익선동 75번지의 소유자는 바로 이은우이다. 아마도 익선동 75번지가 이은우의 거처가 있던 곳이 아닐까 싶다. 나고야고등공업학교를 1911년에 졸업하고 돌아온 이훈우도 1913년에는 조선총독부 탁지부 세관공사과에서 근무하였던 것이 <나고야고등공업학교 일람>의 졸업자 명단을 통해 확인되는데, 총독부 취직을 위해 1911~12년 무렵에 경성으로 가야했다면 이훈우는 큰형의 익선동 집에 머무르지 않았을까?

1912년 토지조사부에 기재된 익선동 75번지의 소유자 '이은우' (오른쪽에서 두번째)


다만, 이훈우의 1910년대 건축 작품으로 알려진 것 중에 부산중학교가 있는데, 부산중학교는 1913년 11월 25일, 부산부 초량동에 신축 교사가 낙성되었다. 만약 이훈우가 세관공사과 소속으로서 부산중학교의 신축 교사 설계 및 건축에 참가했다면, 그는 1913년 당시 경성이 아닌 부산출장소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915년부터는 다시 조선총독부 토목국 영선과에 소속되었으므로, 이훈우는 이 무렵에는 경성에 와서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은우는 1913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인 하동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 시기 이훈우의 주거지가 익선동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곳이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이훈우의 경성 집 주소가 분명히 확인되는 시기는 1925년이다. 이 해 여름에 을축년 대홍수라 불리는 큰 수해가 발생하여 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수재의연금 모금 사업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의연금 기부자 명단은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신문에도 게재되었는데, 8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운니동에 거주하는 기부자들의 명단 중에 2원을 기부한 이훈우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이 기사를 통해서 이훈우의 집이 운니동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1925년 8월 3일 기사의 '운니동', '2원씩', '이훈우'


나아가 1927년 10월 1일 현재 경성-인천 전화번호부에서도 이훈우의 이름이 보인다. 그의 전화번호는 광화문국 1710번이었는데, 등록 주소가 바로 '운니동 70'이다. '운니동'이라는 정보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운니동 70번지는 이훈우의 집 주소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주소는 수은동 60번지에 위치한 직장인 이훈우건축공무소와도 그리 멀지 않고, 이은우의 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익선동과도 가까운 곳이었다.

1927년 10월 1일 현재 경성-인천 전화번호부(사이토 마코토 기념관 소장)의 '이훈우'


최근에 이루어진 후손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1926년에 손자 성희가 태어나자 이훈우는 매우 기뻐하여 하동으로 내려왔고 하동군 악양면 입석리에 한옥을 설계해서 지었다. 이훈우는 한옥의 아래채에, 아내 방씨는 안채에 기거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아내 방씨와 아들 상금은 1926년 무렵에는 하동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경성 집을 오갔는지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 또한 이훈우에게는 경성에서 낳은 상갑이라는 아들이 있다고 하므로, 어린 시절의 이상갑 씨가 경성 집에 머물렀을 수 있다.


이훈우의 운니동 집에 머무른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큰형 이은우의 아들인 이상경(李相慶)이다. 이상경은 1902년 하동에서 태어나, 1926년(또는 1927년)에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 법률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1929년부터는 경성지방법원 서기과 판임관견습으로 근무하였고, 1932년에는 경성지방법원 서기 겸 춘천지청 서기 겸 통역생으로 일하게 되었다. 1934년 인천법원 지청이 개청(開廳)하였을 때 이상경은 지청 서기로 부임하였고, 1936~37년에는 퇴직하였다. 1932년에 간행된 <니혼대학 교우회 회원명부>에는 졸업생 이상경의 주소지가 운니동 70번지로 기재되어 있어, 그가 경성지방법원에 근무할 당시 작은아버지인 이훈우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훈우의 전화번호는 1934년 경성전화번호부에서부터 보이지 않고 있으며, 이상경도 1936~37년에 퇴직한 이후로는 하동에 내려갔다. 또한 이훈우 본인은 1937년 9월에 사망한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훈우의 운니동 집은 이르면 1933년, 늦게는 1937년에는 이미 주인이 바뀐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해당 주소지의 폐쇄 건축물대장 등 관련 자료가 남아 있다면 좀더 구체적인 상황이 파악될 터이다.


<참고문헌>

김현경, Dylan Yu, 황두진, <건축가 이훈우에 대한 연구>

김현경, Dylan Yu, 황두진, <건축가 이훈우에 대한 추가 연구 및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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