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이훈우에 대한 연구>가 2020년에 발표되면서 이훈우의 '재발견'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에 이훈우라는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건축사학 분야에서 이훈우는 이미 <조선총독부 청사 신영지>나 1920년대 신문의 기고문 등을 통하여 당대 활동한 건축가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어느 학교를 나왔고 어떤 전문 교육을 받았는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여재규 씨가 1978년에 펴낸 『하동군사』를 보면 이미 이훈우의 유학 경력이 알려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외국 유학생사'라는 항목을 보면 1909년 5월에 메이지대 법과에 입학한 여경엽(余璟燁)이 1913년 7월에 졸업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그 옆에 '같은 해 이훈우(악양면 입석리) 동경에 유학, 고공(高工) 졸업'이라고 하여 이훈우가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였다고 분명히 적혀 있다. 이 글만 읽으면 도쿄에서 고등공업학교를 다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도쿄 유학 후 나고야로 가서 나고야고등공업학교에 입학했다. 1920년에 조선일보에 실린 이훈우의 건축사무소 개업 기사에서도 도쿄에서 유학한 것으로 서술이 되어 있는데, 『하동군사』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전달 과정에서 잘못 전해진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시 도쿄로 유학간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나고야의 유학생이 거의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지명도 등의 문제로 인해 '나고야' 정보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한다. 또한 『하동군사』에는 이훈우가 일제강점기에 '기수'로 임명되었던 사실에 대해서도 역시 '관계(官界)' 항목에 기재하고 있다. 단, 생몰년이 '1996(1896의 잘못)?-1946?'으로 되어 있어 부정확한 정보가 혼입되어 있다.
여재규 씨가 하동군의 역사를 처음 수집한 것은 1930년이고, 6.25 때 자료들이 불탄 이후에 다시 수집하여 1971년부터 편찬에 착수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늦어도 1970년대 초반에는 이훈우의 존재가 하동군 안에서도 어느 정도는 인지되고 있었을 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훈우의 큰형인 이은우와 둘째 형 이진우의 후손이 당시 하동에 있었고, 무엇보다 이훈우의 손자인 이성희가 악양중학교 교사, 하동군 교육위원 등을 지내며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것이 최근 신문 매체 뉴스경남과 천도교의 기관지 <신인간>에 최정간 씨가 기고한 <한국 최초 근대 건축의 아버지 이훈우를 회상한다>라는 글이다.
최정간 씨는 1986년 가을 즈음에 일본 문학과 한국화를 전공했다는 서정호 선생의 소개로 이상경(이은우의 아들)의 두 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 때 두 자매가 할아버지(이은우)의 동생, 즉 이훈우가 일제강점기에 유명한 건축가이자 진주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건물을 설계한 분이지만 술을 너무 좋아해 일찍 돌아가셨다고 회고했다는 것이다. 최정간 씨의 글에 따르면 이훈우가 나고야고등공업학교에서 건축 유학을 하고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 관련 건물을 설계하게 된 데는 큰형 이은우의 주선과 권유가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아마도 최정간 씨가 두 자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하동의 지역 사회 안에서 이미 이훈우가 진주 일신여고보를 설계한 사실이 알려져 있었고, 그의 건축가로서의 활동도 어느 정도 드러나 있었다고 한다면, 아직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이훈우에 대한 또다른 사실들이 하동 어딘가에서 전해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새로이 발견된 이훈우를 한국 근대건축의 역사 속에 어떤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하는가 하는 문제도 매우 중요하지만, 오히려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시절의 이훈우상(像)을 파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새 물감으로 그림을 덧칠해 나가기 전에 바탕에 그려진 밑그림의 흔적들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공동연구자인 황두진 씨는 <건축가 이훈우의 진주 일신여고보>에서 소설가 박경리와 화가 이성자가 일신여고보를 졸업한 것을 지적하였듯이, 이훈우와 이성자의 연결고리를 언급한 바 있다. 또한 결과론적이지만, 이훈우가 맡은 것으로 알려진 건축 작품들 중에는 민족 종교, 민족 학교, 민족 언론과 같은 단체들을 상대로 한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글나라(안영숙) 님이 이성자 화백 탄신 100주년 기념 행사와 관련하여 2019년 1월에 남긴 글을 최근에 발견하였는데, 여기서 다음과 같은 서술이 눈에 들어온다.
하동을 연구하다가 이훈우 건축예술가를 몇 년 전 알게 되고 난 뒤 민족정신과 정서에 관심을 두면서 이성자와 이훈우 비교논문을 써 보리라 당찬 각오도 하면서 연구욕구를 불태우기도 하여 제 스스로 신비에 빠지기도 합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성자 화가와 이훈우 건축예술가를 비교하는 논문을 써 보려고 합니다.
이 글은 <건축가 이훈우에 대한 연구>가 발표된 2020년보다 전에 작성된 글이며, 그보다도 몇 년 전에 작성자께서는 하동을 연구하면서 이훈우의 존재를 알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성자와 이훈우의 연관성, 그리고 '민족'이라는 화두가 황두진 씨의 아이디어와 맞닿아 있는 것 같아 흠칫 놀랐다. 작성자 분이 이훈우의 어떤 점을 발견하고 그와 같은 생각을 하시게 되었는지 매우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공동연구자들이 이훈우를 '재발견'하기에 앞서 그의 존재를 마주하였던 분들에게 있어 이훈우라는 인물의 이미지란 어떤 것이었을까? 가능하다면 여러 선생님들과 교류하여 이훈우에 관한 '기억'을 보다 풍성한 것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