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토모에 대한 가인 의식과 『아즈마카가미』 기사의 문제
* 이 글은 2021년 6월 26일 지바시(千葉市)에서 개최한 2021년도 지바씨(千葉氏) 공개 시민강좌 〈무가정권 성립기 동국 무사의 심성: '귀종' 요리토모와 지바 일족〉에서 김현경이 강연한 동명의 강연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 및 일부 정리한 것입니다.
- 지난 글에 이어서 -
먼저 미우라씨의 경우 겐포(建保) 원년(1213) 미우라 요시무라(三浦義村)와 다네요시(胤義) 형제의 발언에 따르면, 앞서 이야기에서 목숨을 잃은 요시아키의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다메쓰구(爲繼)는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에 속하여 후삼년 전쟁에 참가하였고, 다메쓰구를 선조로서 의식하고 있습니다. 덴요(天養) 원년(1144),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가 오바노 미쿠리야(大庭御廚)에 난입했을 때 요시쓰구는 아들 요시아키와 함께 요시토모 측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는 실로 겐케를 대대로 섬긴 가인이며, 그의 언동이라는 것도 여러 대에 걸친 가인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는 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겐케의 가인 모두가 요리토모에게 복종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야마노우치 스도씨(山內首藤氏)의 경우, 대대로 겐케에 충성을 다했다고 알려졌으며 야마노우치 스도 도시미치(山內首藤俊通)라는 인물은 헤이지의 난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쓰네토시(經俊) 같은 경우는 오바 가게치카(大庭景親)라는 헤이케 측 무사의 편을 들어 이시바시산 전투에서는 요리토모를 향해 직접 화살을 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가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모두 요리토모에게 순종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아즈마카가미』의 기사를 앞서 보셨습니다만, 그것이 정말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는 점입니다. 『엔교본 헤이케 모노가타리(延慶本平家物語)』라는 『헤이케 모노가타리』의 이본(異本) 중 하나가 있는데, 이는 요미본 계열이라고 합니다. 비파법사(琵琶法師)가 헤이케 모노가타리를 상연(上演)하는 데 대본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타리본(語り本)'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좀더 다양한 사실을 포함시켜 가필한 것을 '요미본(讀み本)'이라고 합니다. 최근 연구에서는 '요미본' 쪽이 다양한 실태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가 있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꽤 오래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로 역사학 논문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것이 『엔교본 헤이케 모노가타리』입니다.
여기에 적혀 있는 기누가사성(衣笠城)에서의 당시 상황 묘사를 살펴보면, 오스케(大介)라고 적혀 있는 미우라 요시아키가 이렇게 말합니다. '자손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지금은 성 안 이외에는 기세가 약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쉽게 자결해서는 안된다. 효에노스케 님(요리토모)은 허망하게 전사하실 분이 아니다. 스케 님의 생사를 확실히 알 수 없는 만큼 보잘 것 없는 목숨이라도 살아서 자초지종을 모두 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시아키의 나이는 이미 79세(혹은 84세)에 달하였고, 게다가 지쳐 있었으므로 '"요시아키가 얼마 안 남은 목숨을 아까워 하여 성 밖으로 도망쳤다"고 후세에 소문날 것이 유감스러우니, 나를 버리고 도망쳐라. 전혀 한스럽게 생각하지 마라'고 요시아키는 말한 것입니다. 이는 요컨대 자기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쳤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부끄러우니 자기를 버리고 모두 도망가라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는 『아즈마카가미』의 기록과 비슷합니다. 다만, 그 앞에 나오는 효에노스케 님, 즉 요리토모는 그렇게 간단히 죽임을 당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이야기에서 '귀종'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자손들은 결국 어떻게 했느냐 하면 요시아키가 여기에 남아 있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시아키를 가마에 태워서 데리고 가버립니다. 하지만 적들이 접근해오자 가마를 메고 있던 사람들은 요시아키의 자식들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가마를 버리고 도망쳤고, 요시아키는 홀로 남겨져 에도 다로 시게나가(江戶太郞重長)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다카하시 히데키(高橋秀樹) 씨의 연구에서는 미우라노스케(三浦介) 요시아키가 전설화되는 과정 속 충의(忠義)의 에피소드로서, 막부의 '창조신화' 속에 이러한 요시아키의 장렬한 죽음이 그려지게 된 것이고, 반대로 현실에 가까운 것은 『엔교본 헤이케 모노가타리』 쪽이 아닌가 하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로 하여금 슬픈 최후를 맞이하게 만든 요시즈미 등에게는 역시 아버지가 성에 남아서 최후를 맞이했다고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했을 것이고, 이처럼 스토리가 바뀌었다고 한다면 미우라 요시아키의 귀종 발언이라는 것도 후대의 윤색일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애초에 『아즈마카가미』라는 책 자체는 막부의 준공식 역사서이지만, 기존 연구에 따르면 꽤 후대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대체로 14세기 초엽에 편찬된 것으로 특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귀종'이라는 말이 나오는 부분도 역시 나중에 윤색되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정리하자면, 물론 요시아키 개인의 입장으로는 자신의 원래 주군이었던 사람의 적자를 귀종이라고 인정했을 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런 마음을 갖고 제대로 봉사하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귀종이라는 말 자체에는 여러 모로 의문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