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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경 Feb 15. 2023

일신고보와 이훈우의 관계는?

조선은행 조사부에서 발간한 다이쇼 9년(1920) 10월 상반 『조선사정』에는 정치 및 사회 부문에서 '진주고보 설립'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진주의 조선인 유력자 사이에 교육열이 왕성해져, 고등보통학교 설립에 대하여 여러 차례 협의를 마친 결과, 박재표(朴在杓) 씨를 창립위원장으로 추천하여 40만 원의 예산을 가지고 기부금을 모집 중이었는데, 이번에 김기태(金琪邰, 원문에는 金琪臺) 씨의 15만 원을 필두로 지수면(智水面) 허(許) 씨(허준, 허만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 인용자 주)의 7만 원 등 합계 37만 여원에 달하여, 인가받는 대로 교사의 건축공사에 착수할 터라고 하는 것은 조선 교육계를 위하여 경축해야 할 일이다. (48쪽)


이때 진주에서의 고보 설립 움직임과 관련해서는 〈건축가 이훈우의 진주 일신여고보〉에서도 다룬 바 있어 생략하겠지만, 일신고보 설립이 실패로 돌아가고 일신여고보로 전환되었을 때 그 교사의 설계, 건축을 담당한 것은 이훈우와 경상남도 회계과 영선 담당 기술자들이었다. 이러한 연관성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이훈우가 일신고보의 교사 건물 역시 설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 바 있다.


1920년 10월 당시 진주고보(일신고보)의 인가가 내려지는 대로 바로 건축공사에 들어가겠다고 하였던 것은 이 시점에 이미 부지가 확보되고 건축 설계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었음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닐까? 이때 설계를 담당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훈우는 1920년 7월 1일 당시 총독관방 토목부 영선과 기수로 재직 중이었지만, 같은 해 12월 이전에 기수직을 사퇴하고 12월 10일에는 수은동 오쿠다 사진관 건물에 이훈우건축공무소를 개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920년 10월 당시 진주고보의 설계를 이훈우가 맡았다고 가정한다면, 아직 총독부 직원으로 재직 중이면서 내직(內職), 즉 아르바이트의 성격으로 설계를 담당했거나, 이미 사퇴한 일반 민간인으로서 아직 건축사무소는 없지만 미리 설계를 맡게 되었을 수도 있다. 물론 이훈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진주의 고등보통학교 건물 설계 의뢰가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으나, 당시 조선인 건축가로 활동할 만한 사람은 이훈우 외에는 찾기 어려우며 건물의 성격 상 일본인에게 부탁하기도 곤란한 점이 있었다. (혹은 서양 건축가에게 의뢰한 것인가?)


경상남도에 고등보통학교를 세우자는 움직임은 1922년 10월이 되어서야 '과거 수년 간 결사적으로 활동 노력한 결과 기본금 50만 원을 수립'하여 진척을 보게 되었다. 이 때 경남 일신고등보통학교 기성회의 이사장은 김현국, 이사는 김기태, 박재호(박재표의 형제), 박재표, 이은우(이훈우의 큰형) 등이었다. 1923년 3월 30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50여 만 원의 기부금 중 김현국이 5만원, 김기태가 2만원, 박재호가 2만원, 이은우가 2천원, 박재표가 2천원을 기부한 것이 확인된다. 큰형인 이은우도 일신고보 설립 운동에 참여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에 그 동생인 이훈우가 어떠한 형태로든 이 사업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 않을까? 하지만 확실한 물증은 없다.


현재 진주여고 박물관에는 재단법인일신고등보통학교 본관 도면이 패널로 전시되어 있다. 이 도면의 제작 시기를 혹시 1920년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까? 이 도면을 이훈우가 제작한 도면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하나도 없지만, 다시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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