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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경 Jul 01. 2023

'귀종재흥' 당시의 지바씨 (4)

무사와 '귀종'의 관계

* 이 글은 2021년 6월 26일 지바시(千葉市)에서 개최한 2021년도 지바씨(千葉氏) 공개 시민강좌 〈무가정권 성립기 동국 무사의 심성: '귀종' 요리토모와 지바 일족〉에서 김현경이 강연한 동명의 강연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 및 일부 정리한 것입니다.




- 지난 글에 이어서 -


그렇게 되면, 요리토모는 귀종이냐 아니냐라고 묻는다면, 이 기준에 따르면 저는 귀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가와치 겐지(河內源氏)의 가계를 잇는 사람들은 공경에 도달하지 못하였고, 원이나 천황의 핏줄로부터도 멀어져서, 가격 면에서는 역시 귀종이라고 불리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가와치 겐지, 요리토모의 아버지인 요시토모(義朝) 같은 경우는 무사에 해당합니다. 무사와 귀종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었느냐면, 무사는 일단 '사무라이(侍)' 쪽에 포함되겠지요. 계층으로서는 조금 지위가 높으면 '제대부'에 들어갑니다만, 5위, 6위인 사무라이가 무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섭관가 등에 봉사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권문인 귀종에 대하여 봉사하는 존재가 무사이며, 그 안에 포함시킨다고 한다면 요리토모는 귀종이 아니게 되어 버립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교쿠요』의 주에이(壽永) 2년(1183) 11월 22일조입니다. 여기서는 호주지(法住寺) 전투라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기소 요시나카(木曾義仲)라는 인물이 앞서 이야기한 겐페이 전쟁 때 교토로 상락(上洛)해 와서 헤이케는 도망치고 맙니다. 그 후 고시라카와 상황과 교토를 안정시키는 상황이 됩니다만, 결국 고시라카와 상황과 사이가 틀어지게 되어, 고시라카와 상황의 어소(御所)를 습격하는 호주지 전투가 일어납니다. 그 때 권중납언(權中納言) 후지와라노 요리자네(藤原賴實)라는 인물이 히타타레(直垂)에 오리에보시(折烏帽子) 차림으로 도주하고 있던 것을 무사들이 붙잡은 것입니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시면 어떨까 하는데요, 무사들은 왜 그를 붙잡았느냐 하면 그가 '경상(卿相)'임을 알지 못하고 그 목을 베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요리자네이며, 권중납언이라고 말하였지만, 입고 있는 의상을 보면 아무래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여겨져, 무사들은 그가 거짓으로 귀종을 칭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장으로 귀종이냐 아니냐를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보통은 속대(束帶)를 입거나 하는 존재가 그러한 옷을 입고 있으면 역시 권중납언이라고 칭하는 게 이상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요컨대 무사들은 공경들 가운데 귀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사 중에 귀종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거병 이후, 반란이 성공하여 분지(文治) 원년(1185)이 되었을 때, 요리토모는 권대납언, 우근위대장 직에 취임하였고, 그 아들들인 요리이에(賴家), 사네토모(實朝)도 정2위에 오르거나 대신에 취임하게 됩니다. 13세기 전후에는 섭관가의 적자가 좌대장에 임명되는 원칙이 어느 정도 정착되는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는 좌대장 임관에 상당히 집착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자신의 가문을 섭관가에 준하는 가격으로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네토모 대에 이르면 자신의 집안도 요리토모로부터 이어지는 무가의 권문이라고 보았고, 이 때는 무가의 귀종이라고 불린 일은 아직 없지만, 그렇게 인식하게 되었다고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겐지 쇼군인 사네토모가 살해당한 뒤, 그 다음에 섭관가로부터 쇼군을 맞이한다거나 친왕 쇼군이 탄생하므로, 겐지 쇼군의 집안이 섭관가나 천황가로부터 그 후계자를 맞이한다는 점에서, 같은 레벨의 가문이라는 인식이 작용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겐지 쇼군 가문이 섭관가에 준하는 집안으로 성장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그 전제로 추정되는 것이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를 필두로 한 헤이케 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아버지인 다다모리 때에도 공경 직전까지 도달하였는데, 기요모리 본인도 태정대신에 취임하였고, 그 자식들은 '긴다치(公達)'라고 불리며 영화를 누리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급 귀족들 중에는 헤이케에 대한 신분 차이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다이라노 무네모리(平宗盛, 기요모리의 아들)이 그 여동생의 남편인 후지와라노 다카후사(藤原隆房)의 딸을 양녀로 삼았는데, 그 딸을 구조 요시미치(九條良通)와 혼인시킬 것을 섭관가에 제안하였습니다. 요시미치의 아버지인 구조 가네자네(九條兼實)는 만약 이 제안을 따르고 만다면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키게 된다고 일기에 적고 있는 것입니다. 무가 귀족이 귀종으로 성립하는 것은 역시 막부가 성립되기를 기다려야 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서 천황의 후예=귀종이라는 견해도 있다는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아즈마카가미』의 기사에 나오는 미나모토 가문 '귀종'의 근거라는 것은 천황의 후예로서의 미나모토씨의 혈통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사실 무사의 귀종과 관련된 사료 상의 사례는 14세기에 몇 가지가 확인됩니다. 그 중 하나를 보도록 합시다. 「가네사와(金澤) 문고 고문서」에 들어 있는 문서입니다. 누가 쓴 것인지는 특정할 수 없습니다만, 아마도 호조(北條)씨 일족인 사람으로 여겨지는데, 그 어머니에 대한 글입니다. 그 속에 나오는 문장은 '간무 천황의 핏줄을 이어받아 14대 동안 오래도록 동관(東關)의 유영(柳營)에서 명예를 떨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에는 '귀종의 여윤(餘胤)에 관한 일'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어, 귀종이라는 것은 간무 천황의 후예임을 이야기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조씨 혹은 그 분파인 가네사와씨에서는 자기 집안의 존귀함에 대하여 천황의 핏줄을 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채용한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실태를 살펴보면 호조씨는 제대부층인 상태로 남아 있었고, 제대부층보다 상위에 있는 공경층에 정식으로 위계, 관직을 받고 도달한 적은 없었습니다. 강고한 귀족사회의 질서 구조가 존재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지위와 신분의 질곡에 의한 간극을 메우기 위한 방법으로서 간무 천황의 자손으로서의 귀종성을 제시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4세기라고 하니 '귀종' 기사가 등장하는 『아즈마카가미』의 편찬 시기도 14세기 초엽이라고 본다면, 귀종이라는 말도 당시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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