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은 Jan 04. 2022

내 결혼의 비밀


 남편이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며 "엄만 뭐 하시나"한다. "드라마는 다 보셨나?" 들으라는 소린지 혼잣말인지 중얼거린다.


하루 종일 아니, 거의 삼백육십오일 같이 붙어 있다 보니 투닥거릴 일이 자꾸 생긴다. 젊었을 때도 상대 마음을 못 읽던 사람인데 이리 나이 먹어서야 오죽할까. 


 지난 연말 일도 그렇다. 어렵게 구한 음악회 표를 두고 같이 가겠냐 했더니 그러마 해놓고는 (두어 달 전엔 안 가겠다 해서 혼자 다녀왔다. 난 안 가겠다 하면 그냥 안 데려간다) 샛노란 맨투맨 티셔츠를 입는 만행을 저질렀다. 낮에 등 파진 드레스 입고 갈 거냐고 농담을 한 걸로 봐서 음악회에 뭘 입고 가야 할지 대충 안다는 얘긴데 그럼에도 집에서 입는 옷을 꺼내 든 건 억지로 너한테 맞춰 주는 거라고 시위하는 거일밖에. 황당해하는 내 얼굴을 보고 다시 외출복으로 갈아입긴 했지만 벌써 내 기분은 엉망이 됐다. 그럼에도 베토벤 합창은 좋았고 오랜만의 밤 외출도 좋아 기분이 풀렸는데 돌아오는 길이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가 아니라고 짜증을 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집까지 37분', 카카오맵 경로로 총알같이 안내한 건데. 


 잊을만하면 또 풀릴만하면 되풀이되는 삑싸리에 내 말수가 줄어들면 남편은  "엄만 뭐 하시나" 한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일어나 '엄마'한테 간다. 앞 동 장모님,


 난 나의 엄마랑 아주 친한 사이가 못된다. 물론 친하다. 그러나 속 깊이 공감을 하고 마음을 나눌 만큼은 아니라는 건 엄마도 알고 나도 안다. 그래서 유감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린 서로 걱정하고 부족한 거 채워가며 잘 지내고 있다. 사실 나의 엄마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리 많진 않다. 천성이 그러신 지 힘든 역사 (열여섯에 부모님을 잃고 재산을 잃고 고향을 버리고 칠 남매가 평양에서 부산까지 내려가야 하는 기막힌 일을 겪으셨다는)를 거쳐 오느라 그러신 지 친사람 성향이 아니시다. 막내 이모 그러니까 엄마의 막내 동생 표현에 따르면 '우린 고슴도치 같은 존재야, 가까이 가면 찔려~~' ㅎㅎ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가까이 갔다가 도망을 가버렸다. 곁에서 보면 참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딱 한 사람 예외가 있다. 바로 남편. 즉 엄마에겐 큰 사위. 찔려도 가까이 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엄마에게 유일하게 안 찔린 사람이 바로 나의 남편이다. 희한하게 처음부터 그랬다. 


 내 친구들이 남편을 처음 본 건 내 졸업식날이었다. 2월 말 추웠던 그날 남편은 엉뚱하게 흰 헝겊 마스크를 쓰고 흰 종이에 싼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지금이야 느닷없는 염병이 (욕 아니다) 돌아 마스크 안 쓰면 손가락질당하지만 그땐 마스크 쓴 사람은 손가락질은 아니라도 좀 이상하게 보였다. 게다가 결혼할 여자 졸업식에, 그것도 (엄마 표현에 따르면) 때가 꼬질꼬질한. 나중에 들으니 자긴 피부가 얇아 날이 추우면 입 주변이 얼어 아프다고. 어찌 생각하면 날 덜 좋아했다는 거지. 정말 좋았으면 그깟 입이 어는 게 문제였겠나. 어쨌든 내 남편을 본 친구들은 지들끼리 수군거렸단다. 대은이 죽었다고, 가스통지고 불구덩이에 들어가고 있다고.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듣고 막 욕했다. 그런 얘긴 그때 바로 내 면전에서 했어야지, 왜 뒤에서 니들끼리 하고 만 거냐고. 아빠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셨다. 아무리 피워도 엄마가 꿈쩍도 안 하시니 내게 넌지시 눈이 너무 사납게 생겼다, 눈이 저리 생긴 사람 눈 값 한다는 전혀 아빠 답지 않은 말을 하셔서 엥? 하고 놀랐었다. 아빠가 남의 흉을, 더구나 외모를 지적하는 흉을 보신 건 그때가 유일무이했다. 여동생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고 눈이 왕사발만 해졌다. 우린 경상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집안에선 이북 말을 쓰고 친척들도 대부분 이북사람들이라 경상도 말 쓰는 어른이 집에 오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어쨌든 모든 사람이 남편을 보고 머리를 흔들었다. 아냐아냐아냐~~ 


 그런데 딱 한 사람, 나의 엄마는 첫눈에 남편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 상견례 전 양쪽 엄마들과 같이 만나던 날, 허리를 꼿꼿하게 하고 똑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고, 얼굴이 폐병환잔가 싶게 하얗더라고, 만만찮게 생겨 허튼 짓은 안 하겠더라고~~~ 양쪽 엄마들이 각각 잘난 자식을 데리고 긴장 팽팽하게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서 엄마는 생뚱맞게 "아드님이 참 좋으시네요" 하고 말했다. 죽어도 남 좋은 소리는 안 하던 양반이. 시어머니는 좀 놀라신 듯했지만 이내 당연하지 하는 얼굴을 하셨고 남편은 상대의 칭찬을 꿀꺽 먹기만 한 자신의 엄마에게 "엄마도 따님이 참 좋다 하셔야지요" 하고 뼈 있는 얘길 했다. 

 

 양쪽이 다 결혼해야 할 나이라 (요즘 같음 아직 멀었다 하겠지만) 일사천리로 진행이 됐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될 일이 아녔을 조건들도 꽤 있었는데 뭔 바람이 불었는지 엄마는 만사 오케이였다. 그땐 연년생인 여동생 때문에 내 결혼을 말 채찍질하듯 몰아붙인다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면 사위 자리 하나만은 무진장 마음에 들었던 거다. 두고두고 네 시어머니 때문에~~ 시어머니 자리가~~ 하고 뒷담화를 하신 걸 보면.   


 그때 체머리를 흔들던 사람들이 옳았다. 정말 옳았다. 아버지의 눈 값 걱정은 진짜 진짜 옳았고 가스통과 불구덩이도 옳았고 거친 경상도 말도 옳았다. 그렇지만 어쩌나. 쉽게 물릴 수도 없고 깨끗이 물려지지도 않는 게 결혼인데. 


 어쨌든 이십 년 전 친정 부모님이 오래 살던 곳을 정리하고 우리 앞 동으로 이사 오시면서 일 년에 한두 번 보던 사위를 자주 보게 되셨다. 의심을 하시던 아버지는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이라고 좋아하셨고 남편은 수시로 처가에 들락날락하면서 '아버님' '어머님'을 따랐다. 그러다가 십여 년 전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만 남은 후로는 맨날 장모님 걱정이다. 날이 어두워도 추워져도 더워도~~~ 어머님 외로우시겠다. 제대로 된 반찬 없이 국 한 그릇으로 식사하시더라. 외출로 못하시고 얼마나 답답하시겠냐~~~  


 내가 엄마랑 투닥거리고 돌아와 씩씩대면 엄마 그런 거 몰랐냐, 그냥 병이라 생각해야지 그리 나이 드신 분한테 불평이나 하고~~ 그리 꿋꿋하시니 그 연세에 약한 소리 안 하시고 잘 지내시잖아 하면서 편을 든다. 엄마랑 같이 외출하는 날엔 꼭 팔짱을 끼어 드리고 나란히 도란도란 얘기하면서 걷는 게 아주 사이좋은 모자지간 같아 뒤에서 따라가다가 '원래 성질 사나운 사람들끼리라 잘 지내나?'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한다. 큰아들이 너무 꼬장꼬장하다 시는 자기 엄마 즉 나의 시어머니가 보시면 기절하실 장면이다. 남편은 어머니가 다정하지 않았다고 많이 섭섭해한다. 공부만 하라 했지 따뜻한 말 한마디 없었다고 두고두고 허전해한다.(뒤끝이 쇠심줄인 것도 울 엄말 닮았다) 그래서 항상 자식에게 관심이 많은 장모님을 존경하고 좋아한다고.  


남이 보면 모자지간

 코로나로 엄마가 십 년째 다니던 평생학습관에 못 가시게 되자 남편은 엄마가 좋아하실 영화며 드라마 다큐멘터리를 찾아 안 쓰는 컴퓨터에 깔아 놓고 클릭만 하면 볼 수 있게 바탕화면에 일일이 저장해드렸다. 이 영화가 재밌더라 하면 그 비슷한 걸 찾아 죄 보게 해 드리고는 어머니가 생각보다 터프하시다고 좋아한다. 람보나 터미네이터 같은 시원한 액션 영화를 재미있어하신다고. 지난주엔 두 시간 가까이 있다 오더니 같이 태평양 전쟁에 관한 다큐를 봤다며 엄마가 겪은 시절의 이야기라 아주 좋아하셨다고 싱글벙글이다.


 덕분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엄마 팔짱도 안 껴주는 불효자식이 됐고 둘째 사위는 꼭 장모님이라고만 부르는 엄숙주의자가 됐고 큰딸은 무뚝뚝하기 짝이 없이 착한 남편을 쥐 잡듯 하는 악처가 됐다. 너 같은 악처가 하는 나무람에 지쳐 어쩌다 한 번씩 사위의 만행을 말해주면 엄마는 '뭐시라, 이 녀석을 그냥~~ ' 하고 주먹 쥐고 일어서는 대신 '설마 우리 착한 사위가 그럴 리가' 하고 만다. 


 오늘도 남편은 '엄마'한테 갔다 왔다. 별거 아닌 일로 짜증을 내다 과해져 내 화를 돋웠다. 성질이 뻗은 내가 밖으로 나가 훠이훠이 돌다 들어왔더니 이번엔 남편이 슬그머니 나간다. 사죄의 커피를 뽑아 놓고. 설마? 했는데 저녁 밥상머리에서 '엄마가 유럽 여행 간 준엽이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네 어쩌네~~'한다. 에휴~~


 역시 울 엄마는 손해 볼 일은 안 하는 사람이다. 손톱자국도 안 날 양반이 어째 그런 결혼을 나서서 시켰을까 했는데 엄마 말년이 외롭지 않으려고 그런 거다. 저 녀석 좋은 사윗감이야, 오래오래 나한테 잘할 녀석이구만 하고 알아본 거다. 딸년이야 힘들던 말던 엄마가 먼저였던 거다. 오래된 내 결혼의 비밀을 풀었다.    




덧. 그래도 아빠는 알고 계셨다. 처음에도 나중에도. 어쩌다 한 번씩, 잘 지내냐? 니가 속이 깊어 말 안 하는 거 안다 하셨다. 그래서 그냥 끙 참고 살았다. 내 삶의 좋은 거 대부분은 아빠 덕이다. 그리고 엄마 덕이다




작가의 이전글 죽음을 바라 보는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