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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은 Jun 15. 2024

오늘도 마이너스 손

벌써 4개째


 웬만하면 남편 이야기는 쓰지 않으려고 한다. 좋거나 나빠서가 아니라 누워 침 뱉기 같아서.ㅎㅎㅎ

친구 말마따나 결혼식에 목줄 묶여 끌려 나간 것 아닌 다음에야 내가 골라 내 발로 걸어 나가 한 결혼이니 모든 게 내 탓이니라 하면서 산다. 그럼에도 '도대체 어디가 잘못돼서?'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을 때가 종종 있다. 에휴~~


 벌써 네 개째다. 사십 년 가까이 같이 살면서 선풍기 네 개를 뿌셔먹었다(맞춤법은 무슨~) 하면 10년에 하나꼴이니 무던하다겠지만 십여 년 동안 4대다. 젊어서 힘이 있을 때는 내내 선풍기 관리를 내가 했었으니까. 여름이 끝나면 다 분해해 깨끗이 씻어 말려 커버를 씌우고 뒷베란다 선반에 나란히 세워뒀었다. 그리고 다음 여름이 되면 고대로 꺼내 커버 벗기고 쓰기 시작했다. 참 간단했다. 그런데 점점 힘이 딸리면서 선반에 올리고 내리는 것만 해달라 했는데, 정말 딱 그것만 해달라 했는데 번번이 선풍기가 못 쓰게 되었다. 불가사의, 미스터리, 이해불가!


 일찍 찾아온 더위에 일찌감치 새로 사 시운전만 해보고 넣으려던 선풍기를 계속 돌리고 있었다. 그래도 밤엔 공기가 선선했는데 그제부터는 열대야니 뭐니 말까지 나올 정도로 더웠다. 대체 지구가 어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남편이 선풍기를 더 꺼내려고 뒷베란다에 간 줄 았았으면 내가 나섰을 텐데 뒷방에서 뭔가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나고야 알았다. 


-왜?

-에이씨

-왜?

-선풍기 못 쓰게 됐네.

-뭐야!!!!!!!


 빈손으로 나오는 남편더러 소리를 질렀더니 자기는 맹세코 밑받침만 잡고 선반 위에서 내렸는데 망틀이 부러졌단다. '그게 공대전공이 할 소리냐?' 가 터져 나왔지만 꾹 참았다. 제일 싫어하는 게 전공얘기니까. (왜 난 공대 오빠를 좋아했을까. ㅠ.ㅠ)


-밑엘 잡았는데 왜 위가 부러져. 말이 되는 소릴해야지.

-진짜라니까, 딱 모가지만 잡았는데 망이 부러지더라고.


아이구 참 재주도 좋네 하고 혀를 차면서 뒷방에 갔더니 헐벗은 선풍기가 민낯으로 서 있다.

 

내 얼굴이 어디 갔나? 하는 둣


-어째 몇 년 잠잠하다 했어. 이게 4대째야 4대째.

-아 진짜로 모가지만 잡았다니까. 


 번번이 모가지만 잡고 내렸는데 번번이 망틀이 부러진다. 사진을 찍어 놓은 게 없어 그렇지 그때마다 망틀의 종류에 따라 가늘지만 튼튼한 실로 맞잡아 묶기도 하고 가는 철사줄로 감기도 하고 심지어 바늘을 달궈 부러진 틀 양쪽에 구멍을 내서 끈으로 통과시켜 잡아매면서 썼다. 이런 뒷감당은 죄 내 몫이다. 일 저지른 남편은 영혼 없이 쳐다보다 내뺀다. 하긴 있어봐야 도움도 안 된다.


 부러진 망틀을 잡고 이래저래 맞춰봤지만 이건 도리가 없다. 이 선풍기는 망틀이 아주 넓어 그만큼 힘을 많이 받는 거라 맞붙잡게 해 봐야 다시 벌어질게 뻔하다. 폐기처분이 불가피. 그걸 알 도리가 없는 트러블메이커는 도망가 있다가 슬그머니 나와 접착제를 붙일까? 얇은 플라스틱 조각으로 덮어볼까? 영양가 없는 소리만 하고 있다. 듣도보도 못한 업체 걸 기어코 골라 사더니 하고 낮은 소리로 욕하며 인터넷에서 저 선풍기 회사를 검색해봤더니 놀랍게도 홈페이지가 뜬다. 이젠 선풍기 장사는 안 하고 다른 걸 팔고 있었는데 천만다행, 부품을 여러 가지 팔고 있었다. 맨 마지막에 보이는 비슷한 선풍기 틀! 이게 웬 떡이야!!!


곁에서 부러진 선풍기를 들여다보는 척하고 있는 남편을 불러 보여줬더니 금방 목소리가 밝아지며 '거봐라, 저게 잘 부러지는 거네. 그러니까 부품을 팔지. 잘 부러지는 거잖아 ' 큰 소리를 쳤다. 제품 번호랑 맞진 않으니 월요일에 전화해 보고 주문하자 하고 말았다. 억울한 마음이 남았는지 계속 선풍기 곁을 맴돌던 남편이 말한다.


-이거 그냥 쓸 수 없나? 

-손가락 부러뜨릴 일 있어?

-에이, 그런 장난할 애도 없는데.


오늘 아침 남편 방에 들어갔더니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얼굴을 다 내어 놓은 채로 빨간 리본을 흩날리며.





 빨간 리본을 날리고 있는 게 안스러워 대충 고친 선풍기. 이걸 본 남편은 역시 대은이는 대단해~~ 하고 활짝 웃는다. 속은 편하겠수.

못을 달궈 구멍을 내고 끈으로 묶었다. 볼쌍사나워.



덧:

'남편'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도 될 만큼 이 양반의 괴상한 에피소드는 무궁무진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사고를 치고는 유쾌하고 명랑하게 말한다.

 

-브런치에 써봐, 재밌겠네.

-싫어, 사람들이 흉봐.

-에이 괜찮아. 아무도 나 모르는데 뭐.

-나보고 흉본다고. 어쩌다 저런 남자랑 사냐고.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남편을 보자니 진즉에 저랬더라면 신혼떄 알콩달콩 살았을텐데 싶다. 그리 호랑이 같이 굴더니만.



부록 

 아들이 사준 차 키링, 한쪽 팔이 빠졌다고 아까워 했더니 고쳐준다고 하고는 내민 작품. 볼때마다 욕 먹는 거 같다. (선풍기 뽀갠 거 브런치에 올렸다고 했더니 이것도 자랑하라 해서 붙였습니다. 맨날 남편 흉이나 보고 있다고 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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