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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Mar 08. 2023

“걔 어디서 알바한대!”

설거지 알바는 부끄러운게 아닌데

때는 바야흐로 2011년도 1월, 나는 영국에서 21살이 되었다. 21년간의 인생도 순탄치는 않았지만, 어찌어찌하다 보니 나는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원하던 건축과로. 아마 영국으로 유학을 간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유학 생활은 쉽지 않았다. 8명이 화장실을 공유하는 제일 저렴한 학교 기숙사에 살고 있었고, 건축 모형 과제를 할 때는 재료가 너무 비싸 제대로 과제 제출도 하지 못했고, 마트에서 장을 볼 때면 손을 떨면서 계산했다. 운이 좋아 유학은 갔지만 경제적으로 풍요롭기까지 한것은 아니었다.


때마침 맨체스터 시내 한식당 ‘백두’에서 설거지 알바를 구한다는 같은 과 동기 누나의 말을 들었다. 한번 지원해 보면 어떻겠냐는 동기 누나의 말에 쉽게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설거지 알바라니…. 고생을 많이 할게 눈에 뻔해 보이기도 했다. 주변 유학생들의 상황도 한 몫 했다. 편차는 있었지만, 명품을 두르고 다니는 다른 과 선배부터 매일 파티를 즐기고 매 끼니 밥을 사 먹는 친구들, 방학마다 스위스니, 프랑스니, 덴마크니, 여행을 가는 친구들, 알바를 하지 않아도 학교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정말 알바하는 사람은 

“걔 어디서 알바한대!”라고 이야기가 퍼질 정도로 한인 유학생 사이에선 드물었다. 하지만 나는 생활비와 용돈이 필요했고, 이미 충분히 지원해주시고 있는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내가 유학비를 모두 충당할 순 없어도 내 생활비와 용돈은 벌어야겠다고 믿었으니까. 그리고 영국행 비행기를 탈 때부터 꿈꿔왔던 유럽 배낭여행을 꼭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한식당에서 설거지 알바 면접이라도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동기 누나에게 한식당 사장님 연락처를 얻어 전화를 드렸다. 

“혹시… 설거지 알바 아직 구하시나요?” 그리고 그 주말 이력서를 들고 한식당에 방문했다. 푸근하게 생기신 한국인 사장님이 앞치마를 두르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설거지 알바 경험은 있어요?” 

“일하면 설거지 말고 주방 보조도 해야 하는데, 요리나 칼질은 좀 해요?” 

“올해 몇 살이지?” 나는 떨리지만 애써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질문에 답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장님은 

“손 좀 보여줘 봐요.”라고 말했다.

“손 보니까 고생 하나도 안 했네. 잘 할 수 있으려나?” 나는 내 손을 유심히 보았다. 가늘고 긴 내 손을 보면서 도대체 고생 안 한 손은 무슨 손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왠지 내 손이 부끄러웠다. 고생 안 한 손을 가지고 있다니. 사장님은 그래도 의욕이 있는 내 모습을 좋게 보셨는지 아니면 한번 속는 셈 치고 날 뽑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다음 주부터 월, 수,금, 5시부터 11시까지 ‘백두’에서 설거지를 하기로 했다.


아니나다를까, 우려하던 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퍼져나갔다. 한인 교회, 형, 누나, 친구들, 학교에 나를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의 ‘백두’ 설거지 알바 소식을 알고 있었다. 물론 내 주변 사람이 한국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신경쓰였다. 창피해서 신경이 쓰였다. 하지말아야 하는 일은 한 사람처럼. 나는 설거지하는 것이 창피했을까? 아니면 유학 와서 알바를 하는 게 창피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부모님이 어렵게 보내주신 유학이 창피했을까? 그리고 몇몇은 나에 대해 퍼진 소식을 신경 쓴다는 걸 알았을까?


“난 진짜 알바하면 카페 같은 데서 알바하고 싶어. 그래도 너는 좋겠다 설거지 알바라도 할 수 있어서.”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사이코패스 같은 성악과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화가 났다.

“재민이 인생 열심히 사네. 화이팅해!” 그저 나를 응원해주려는 교회 형, 누나의 말에 나 혼자 상처받았다.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는 그들의 삶이 부러웠다.

 “너 건축과 아니야? 알바하면서 공부할 수 있어? 과제 하려면 엄청 빡셀 텐데?” 몇몇은 나의 학업에 굉장한 관심을 보이며 걱정을 늦추지 않았다. 어쩌라고. 나는 살아야 하는데.


그들의 말의 의도가 좋은 뜻이었든 아니었든 사회적 시선들은 알바 시작도 전에 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래도 나에게 위로가 되는 건 학자금 대출을 받아 다니는 기숙사 친구들과 여름 방학 때 가겠다고 마음먹었던 유럽 배낭여행이었다.


주말이 지나 월요일이 왔고 나는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알바 경험이 거의 없었던 나는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첫 출근을 했다. ‘백두’에 도착하니 사장님이 웃으면서 나를 맞이해주셨다. 사장님은 손짓으로 어서 빨리 주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이게 설거지가 꽤 힘들어. 그리고 설거지가 별로 없을 때는 양파도 손질하고, 마늘도 까고, 파도 썰고, 당근, 감자, 재료 손질도 다 해야 해. 할 수 있지?” 

“네! 한번 해볼게요.”

사장님은 나에게 방수 앞치마를 두르게 하고 주방 뒤편에 있는 ‘설거지의 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거기에는 이미 어떤 남자가 한가득 쌓인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눈이 처지고 반곱슬의 머리를 한 순하게 생긴 남자에게 사장님이 말했다. 

“새로운 알반데 현빈이 네가 일 좀 알려줘. 설거지는 처음 이래.” 그렇게 설거지 알바가 시작되었다. 알고 보니 나보다 4살은 더 많은 현빈이 형에게 프로페셔널한 설거지를 배웠다. 어떻게 불리고, 닦고, 헹구고, 말리는지 체계적인 시스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시스템과 다르게 설거지는 고달픈 노동이었다. 오랫동안 싱크대 높이에 맞춰 살거지하다 보면 허리가 굉장히 아프고 고무장갑을 안으로 물이 튀어들어 가 손은 매우 축축했다. 


그리고 빠르게 설거지를 다 하고 나면 주방으로 나와 재료를 손질해야 했다. 재료 손질은 사장님이 직접 알려주시기도 하고 조금 출근하는 서빙 담당, 지원이 누나가 알려주기도 했다(그는 마늘은 아주 빠르게 깠다). 나는 주방 사람들의 친절한 가르침에 일을 빠르게 배워나갔고 몇 주 지나지 않아 익숙해졌다. 알바를 시작하기 전에 걱정했던 고됨과 힘듦은 21살이었던 나에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현빈이 형과 지원이 누나와도 재밌게 일했고 가게 청소를 끝으로 각자의 손 등에 핸드크림을 짜주며 퇴근하는 모습은 훈훈하기까지 했다.


사실 현빈이 형과 지원이 누나는 영어 어학연수로 맨체스터에 살고 있었다. 애초에, 영국에 오면서 알바로 생계와 여행 자금을 모을 생각을 했고 설거지와 서빙 알바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알바는 단순한 수익 수단일 뿐이었고 노동은 창피한 게 아니었다. 그런 형, 누나를 보면서 일하니 알바는 할만해졌다. 


알바를 시작한 후에도 사이코패스 친구는 계속해서 설거지 알바하는 나를 부럽다며 이상한 말을 해댔지만 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열심히 산다고 말하던 교회 형, 누나의 말에 나는 더 이상 상처 받지 않았다(당연히 그런 의도가 없었으니). 몇몇 사람들이 걱정하던 내 학업은 아무런 문제 없이 이어졌다. 나는 주방 사람들과 사장님 덕분에 여름 방학이 올 때까지 설거지 알바를 이어 나갔다. 알바로 나는 생활비를 벌었고 틈틈이 유럽 배낭여행 자금도 모았다. 주급으로 알바비를 받는 성취감도 쏠쏠했다. 재밌게 일했고 공부와 알바를 병행하면서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렇게 여름방학까지 열심히 알바하고 공부한 결과, 나는 좋은 성적으로 학기를 마칠 수 있었고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스위스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20일 동안 스위스-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을 둘러볼 예정이었다. 짐은 오직 백 팩 하나뿐이었다. 여행길에 오르는 내 지갑에는 5개월 동안 설거지로 번 여행 경비가 두둑하게 쌓여있었다.


유럽에서 제일 높은 산은 스위스에 있다. 나는 4,158m 높이의 융프라우산에 올라가는 톱니바퀴 기차를 타고 있었다. 한시간 정도 터널을 지나가야하는 톱니바퀴 기차에 앉아 지난 5개월을 생각해보았다. 떨리며 알바를 구했던 일. ‘백두’ 사장님이 내 손을 보시고 고생 안 했다고 말한 일. 주변의 시선과 말들에 흔들리고 걱정했던 일. 처음 현빈이 형에게 식당 설거지 법을 배우던 일. 지원이 누나와 재료를 다듬던 일. 주방 크루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김밥 말던 일. 한 주의 끝에서 현찰로 주급을 받아 집에 가는 길. 혼자 배낭여행을 간다고 주방 크루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던 일. 설거지 알바를 해보고 나니 이건 고됨이나 힘듦보다는 즐거움이었다. 21살, 처음으로 노동의 즐거움을 알았던 것 같다.


설거지 알바를 시작하기 전, 온갖 걱정과 사회적 시선은 사실 내가 만든 것이었다. 설거지 알바를 부끄럽게 느끼고 이런 사실이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나에게 사회적으로 치명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험해본 설거지 알바는 그렇지 않았다. 노동은 나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자립할 수 있는 근력을 키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방에서 만난 알바 선배들은 동료가 되었고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아마 카페에서 알바하고 싶다고 말만 하던 사이코패스 친구는 알지 못했을 기쁨을 나는 배웠다.


설거지 알바를 5개월 해보고 깨달은 것은 나에겐 남들의 시선과 말보다 내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홀로서기’를 꿈꾸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면 그때 설거지 알바를 열심히 했던 내가 사랑스럽다. 귀여운 자식.


스위스 융프라우를 즐긴 후 2주 동안이나 더 나는 배낭여행을 이어갔다. 5개월 동안 알바해서 모은 돈 덕분에 굶지 않고, 계획대로 베른, 밀라노, 베네치아, 니스를 거쳐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마드리드까지 둘러보고 왔다. 내가 스스로 처음 이룬 첫 배낭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 후에도 ‘백두’에서 설거지 알바를 이어갔다. 5개월보다 더 오래. 그리고 졸업 몇 년 후 다시 맨체스터를 찾아갔을 때 ‘백두’는 사라져있었다. 그 자리에 같은 식탁과 의자를 쓰고 있는 이탈리안 식당이 들어와 있었다. 들어보니 사장님은 맨체스터 외곽에 더 큰 한식당을 차려 운영하고 계신다고 했다. 지금도 모두 잘 살고 계시겠지? 닿을 수 없는 안부를 전한다.


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내 손을 들여다보았다. 21살 나의 손보다 많이 갈라지고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내 손이 많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민이. 고생 좀 했네.” 이제라도 핸드크림을 꼬박꼬박 바르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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