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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Apr 14. 2023

노력, 배신, 그리고 싸대기 2대

노력한 만큼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누구를 그렇게 싫어해 본 적이 있을까? 그나마 남아 있던 인류애를 잃어버리고 사회가 썩었다고 생각하게 될 줄 알았을까? 나에게는 노력이 배신했다는 분노가 차오르는 시기가 있었다.


영국에서 건축학 석사 1학년 때 일이었다. 다시 돌아온 맨체스터는 생각보다 암울했다. 도시는 익숙했지만, 아는 얼굴이 없어 외롭고 불안했고 역시나 공부도 쉽지 않았다. 망쳐버린 1학기가 지나고 2학기가 되어 설계 과목 팀 과제가 시작되었다. 영국인 2명, 홍콩 친구 1명, 인도 친구 1명 그리고 한국인인 나로 이루어진 팀은 방문할 수 없는 영국 지방의 옛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과제였다.


전 세계 어디에나 그렇듯 우리 팀의 메인 빌런은 에이미라는 친구였다. 친구라고 말하고 싶지 않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대체 단어가 없다. 그는 모든 의견에 반대하고 오직 자신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꽉 막힌 꼰대였다. 매주, 거의 매일 팀원들과 만나 설계 과제를 하면서 조금씩 완성해갔다. 에이미는 파트 타임 일을 했기 때문에 자주 빠졌지만, 가끔 회의에 참석하는 걸로 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건 별로야. 다른 디자인이 필요할 것 같아.” 

“우리는 여러 가지 디자인 시도해서 이게 제일 논리적인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은 아니야. 나는 이해가 안 되고 내 기준에는 논리적이지 않아.” 

“그럼, 네가 생각하는 제안은 뭔데?”그는 절대 우리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지만, 괜한 고집으로 분위기를 망치고 과제 진행을 더디게 했다. 그냥 차라리 참여하지 말고 무임승차자가 되었더라면 더 좋았겠다.


에이미와 다른 친구들 3명과 함께 나는 3개월 동안 팀 과제를 이어 갔다. 에이미는 무시무시한 빌런이었지만 나는 그의 존재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하지만 내 노력을 비웃는 다른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로라였다.


에이미는 가끔 참석하는 것 치고는 굉장히 정치적이었다. 다른 영국인 친구를 섭외해 자신의 방해 작전을 더 크게 펼쳤다. 다른 친구들과 나는 점점 더 격해지는 대안 없는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우리끼리 최선을 다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너무나도 착하게 우리는 에이미를 설득하려고 했고 매번 에이미는 대책 없이 싫다고만 말할 뿐이었다. 그러다 담당 교수였던 로라에게 중간 점검을 받게 되었다.


에이미는 상의 없이 혼자 준비한 설계 아이디어를 로라에게 설명했다. 모든 팀원은 등골이 오싹했다. 우리가 몇 주 동안 에이미에서 설득하려고 했던 아이디어였다. 꿈인지 생신지 로라는 방향이 잘 잡힌 것 같다며 손뼉을 쳤다. 에이미는 미소를 지으며 로라에게 좋은 결과물을 약속했다. 그 후 에이미와의 대립은 더욱 심해졌지만, 과제를 이어 나가야 했다. 에이미는 우리 아이디어를 매번 이유 없이 반대했지만 결국 자기 아이디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우리 아이디어였다. 어쨌든 완성하자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과제를 진행해갔다. 많이 노력이 필요했고 감정적인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배움이라는 명목 아래 참고 견뎠다. 참. 내가 인내심이 있다는 걸 매일 느꼈다. 아쉽게도 머지않아 에이미의 싸대기를 때리는 건 참을 수 없었다.


학교 건물에서 평소와 같이 에이미의 반대에 맞서 다투고 있었다. 에이미는 착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건 이해할 수 없어. 안돼.”라고 말했다. 끝없는 에이미의 대책 없는 훼방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찰 싹. 찰 싹. 아주 큰 소리가 나게 에이미의 뺨을 때렸다. 에이미의 볼은 빨개졌고 내 손도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모두가 나와 에이미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숨이 가빠졌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때리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떴다. 꿈이었다. 아쉬웠다. 아니다. 그래도 폭력은 외국인으로서 하면 안 되니까 다행이었다. 그나마 답답하고 분노에 차오르던 마음이 살짝 수그러들었다. 조금 시원했다.


현실에서 싸대기를 때리는 일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학위를 따기 전에 추방당해 영영 영국 땅을 밟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 과제는 데드라인 끝에 닿았고 노력과 상관없이 좋지 않은 결과물을 제출해야 했다. 우리는 아쉽지만 최선을 다했다며 서로 수고했다고 다독였다. 에이미는 파트 타임 일을 한다며 또 오지 않았다.


몇 주 후 성적이 나왔고 같은 유닛 친구들은 다 같이 성적을 공유하기 바빴다. 대다수가 교수 로라의 불평등한 평가에 불만을 가졌다. 우리 팀도 마찬가지였다. 에이미는 팀 내 최고 점수를 받았다. 나머지는… 형편없는 점수였다. 유닛 내 다른 친구들에게서 에이미가 로라와 긴밀한 대화를 갖는 걸 봤다는 제보가 이어졌다. 로라에게 가서 따졌다. 형편없는 점수를 준 형편없는 교수였던 로라는 명확한 해명을 하지 못했다. 고장 난 로봇처럼 성적은 바뀔 수 없다만 반복했다. 나와 팀 친구들이 쏟아부은 4개월의 노력, 스트레스, 고민이 물거품이 되는 날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해도 로라 말처럼 성적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나와 친구들의 노력과 고민은 온전히 에이미에게 돌아갔다. 그 후에도 에이미는 다른 친구들의 아이디어를 베끼며 석사 과정을 마쳤다. 교수 로라는 백인의 영국인인 그녀를 애정한 듯 싶다.


노력한다고 모든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비록 그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석사를 하면서 배운 인생 교훈 중 하나였다. 무엇을 달성하고 이루기 위해 죽도록 노력하지만 (비록 죽진 않지만)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아이러니 같은 것인데 노력도 나를 배신할 때가 있다. 하지만 노력한다면 반드시 배우는 게 있고 언젠가 다가올 성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노력하지 않거나, 노력이 헛되었다고 생각하지 말자. 결국 어느 순간에는 내 노력이 빛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노력한 만큼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다음 일을 하면 된다. 실패는 훌훌 털어버리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그 후 나는 석사 2학년을 맞이하면서 다른 교수 유닛으로 이동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교수와 새로운 과제를 시작했다. 새로운 유닛에서는 노력하면서 과정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도 작은 실패와 성공이 이어졌다. 많이 배웠고 그만큼 배웠음에 만족하며 석사과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PS. 그 후 로라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이야기가 학교에 퍼졌고 에이미는 다른 친구 아이디어를 베껴 만든 과제를 졸업 전시회 때 선보여 많은 친구들이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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