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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9시간전

사실 퇴사는 하기 싫었어.

[ 약 ] 

서른이 되던 해에 신입사원이 되었다. 지방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대학교를 나와 서울에 있는 대학원으로 학력을 업그레이드하고 싶어서 석사까지 공부한 탓이었다. 똘똘하지 못한 나는  책임감과 끈기, 노력, 집념 같은 단어들로 대학원 생활을 채워 겨우 졸업했다. 그리고 간신히 추가합격자로 꼰꼰건축에 취업할 수 있었다.


4년이 지났다. 그동안 책임감, 끈기, 노력, 집념 같은 단어는 내 삶의 필수 요소가 되어버렸다. 그것도 그럴 것이 타고난 재능이 없는 나는 남들보다 배로 노력해야 다른 직원들을 따라갈 수 있었다. 다행히 현재 두 개의 프로젝트를 맡고 있고, 서브로 두 프로젝트를 보조하고 있다. 매일 지하철 막차 시간까지 야근을 해야 하고 주말 하루는 꼭 회사에 나와 업무를 해야 하지만 그것마저도 감사하다. 요즘 경제 상황도 좋지 않은데 이렇게 일이 있다는 건 내가 이 각박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증거이니까.


권 소장님은 아침회의에서 몇 차례 이런 말씀하셨다.


“도윤아. 내가 아무리 잘해봤자 소용이 없어. 도윤이 같은 팀원들이 임원의 마인드로 해줘야 결국 우리 팀이 사는 거야.”


우리 팀 팀원 모두가 똑같은 마음인지 함께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다. 수지 차장님은 가끔은 자기 힘에 부치는 프로젝트에 내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그렇게 서로가 힘이 되어준다. 옆자리 권호 대리님은 나의 1년 선배인데 나에게는 하늘 같다. 왜냐면 칼 같은 선배 덕분에 내가 맡은 일은 내가 스스로 처리해야 하며 완벽하게 수행해 내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걸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유일한 후배 은경 사원은 들어온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일이 서툴지만 내가 하나하나 가르쳐주면서 이끌어주고 있다.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팀원들에게 신임을 받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내가 4년 동안 권 소장님 팀에서 일하며 다져온 나의 평판이다. 선배를 도와주고 나의 몫을 완벽하게 해내며 후배를 이끌어주는 4년 차 대리. 회사에서는 신임이 내 이름 석자의 급을 높여준다. 한도윤 = 일 잘하는 사람.


한편으로 나는 신임을 잃는 것이 두렵다. 내가 작은 실수라도 해서 우리 팀 프로젝트에 큰 피해를 입히면 권 소장님은 나를 다시 찾지 않을 것 같다. 팀 이동은 물론이고 감봉이 되거나 해고처리도 가능할 거다. 나는 가끔 차장님을 도와드리는 일에 내가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고민한다. 혹은 나의 똘똘하지 못함 때문에 차장님 성과가 낮아지기라도 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와 신임은 끝장이다. 일을 제시간에 일을 못 끝내 일정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면 아무도 나에게 일을 맡기지 못할 것이다. 후배도 나를 믿고 배울 수 없을 것이고 어쩌면 무시당할지도  모른다. 내가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열심을 다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쌓아온 신임이 무너지고 회사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 뜻은 이 사회에서 나는 상품가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독립된 객채로 살아갈 수 없는 그냥 덜떨어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단 한 번의 실수. 그거 하나면 나는 와장창 무너질 것이다. 조만간 내 상상이 현실이 될 것 같아 두렵다. 






이런 생각들이 내 일상을 부서지게 만들고 있을 때 즈음 정신과 선생님은 내가 “파국화 사고 장애”가 의심이 되고 정신과 약을 복용해야 된다고 진단했다.





[ 원인 ]

정신과 선생님은 한두 번의 검사와 상담을 통해 내가 회사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파국화 사고 장애를 겪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극한의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나타나는 증상으로 공황장애나 번아웃 증후군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꾸준한 약 복용과 상담으로 내가 이런 사고를 컨트롤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 이거는 완벽하게 치료가 안 되는 건가요?”


“환자분께서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증상은 비슷하게 이어 질 수가 있습니다. 약물치료와 상담치료를 병행하면서 증상을 줄이고 컨트롤할 수 있겠지만 완전히 사라진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원인을 제거하라. 무슨 첩보 영화에서 스파이 요원 주인공에게 주는 미션 같았다. 내가 내 삶의 스파이 요원이라면 어떻게 원인을 제거할까. 원인이 뭐지? 스파이 요원은 익명의 상사에게 암호로 이루어진 미션을 받던데.

익명의 상사는 정신과 선생님이었고 암호로 이루어진 내 정신머리에서 미션을 알아내보기로 했다. 야근과 주말출근에도 틈틈이 권 소장에게 양해를 구해 병원을 다녔다. 물론 병원에 가 있는 두어 시간은 야근으로 또 채웠으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상담 치료에서는 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말해야 했다. 어릴 적 부모님과의 관계, 사건들, 가정의 경제 환경, 지방대를 다닐 때의 자격지심, 서울에 올라와 공부할 때의 심리상태, 치열했던 취업 성공기 등 나는 내 삶의 모든 에피소드를 정신과 선생님께 털어놓았다. 


“자신의 삶을 몇 가지 단어로 표현한다면 뭐가 있을까요?”


“노력. 집념. 끈기. 성실. 이런 단어들이 떠올라요.”


“하지만 그런 단어들을 손에 쥐고 살았어도 이런 강도의 스트레스받지 않았던 거죠?”


“네. 맞아요. 어느 정도 제 스스로가 삶을 컨트롤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질서가 없는 것 같은 상담 치료를 몇 차례를 받고 나의 파국적 사고 장애의 원인을 몇 명의 사람으로 범위를 좁힐 수 있었다.









권 소장. 차장님. 권호 선배. 은경 씨.


미션 : 그들을 제거하라.







[ 미션 ]

정신과 선생님의 결론은 사실 짧은 시간에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를 밑은 우리 팀의 소장과 팀원들이 나를 이렇게 만든 원인이라니. 이게 무슨 비극적인 소설의 서사 같은 말인가. 그들의 신임을 얻으려는 나의 욕심과 내가 평생 가지고 있던 노력과 집념 같은 성격이 맞물려 내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정신과 선생님은 말했다. 그동안 나는 피해자였지만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괴롭힘을 받아주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보통의(라는 말을 참 싫어하지만) 사람들은 그럴 경우 부당한 대우에 대해 항의를 하거나 불쾌한 감정을 내뱉는다고 한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더 큰 책임감을 부여해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고. 일종의 정신적 자해행위를 했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정신과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증거를 수집해 보라고 미션의 힌트를 주셨다. 평소 그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녹화, 녹취를 통해 증거를 모으고 그것을 객관적인 시선에서 보라고 하셨다.



녹음 001


도윤 : 소장님…. 제가 죄송한데 지금 메인 프로젝트 두 개에 서브로 차장님이랑 권호 대리님 프로젝트까지 도와드리고 있어서요. 이 프로젝트까지는 못 맡을 것 같습니다.


권 소장: 도윤. 지금 안 바쁜 사람이 어딨어? 네가 이거 안 하면 우리 팀 올해 수주매출 못 채우는 거 몰라? 네가 해야 한다고.


도윤 : 차장님 지금 프로젝트 한 개 하고 계시잖아요. 차장님이 하시면 더 잘하시지 않을까요?


수지 차장 : 어머. 도윤 대리. 지금 나한테 일 미루는 거야? 너무 웃긴다 진짜. 나 프로젝트 하나 하는 거 그게 몇 억짜리고 얼마나 큰 프로젝트인데 그거랑 이거 맡으라고?


권호 대리 : 도윤 씨. 내가 끼어들기 싫은데 객관적으로 봐도 도윤 씨가 맡아야 하는 거예요. 소장님이 팀을 이렇게 운영하신다고 하는데 따라와야죠.


도윤 : 저도 지금 일이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라서요…. 저는 맨날 야근하고 주말에도 나오는데 물리적으로 안될 것 같습니다. 


권 소장 : 그럼 어쩌자고. 대책이 있어? 지금 맡을 사람이 너 밖에 안된다니까? 그냥 은경 씨 부쳐줄 테니까 네가 좀 맡아서 해. 이건 부탁이 아니라 상사로서 하는 오더야.


수지 차장 : 그래. 도윤 대리가 힘들겠지만 한번 해봐. 해보고 안되면 말해. 해보지도 않고 그렇게 하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권호 대리 : 도윤 대리. 맡아야 하는 일이니까 최선을 다해서 해주세요.


도윤 : ….




녹음 002


도윤 : 은경 씨. 내가 오늘까지 하라고 시킨 거 마무리 됐어요?


은경 사원 : 아…. 그거 저 소장님이 서류 정리 시켜서 그거 하느라고 못했는데. 그냥 선배님이 해주시면 안돼요?


도윤 : 그럼 나한테 못한다고 말을 해줘야죠.


은경 사원 : 깜빡했어요. 근데 어차피 제가 했어도 잘 못했을 거라서 그냥 대리님이 해주세요.


도윤 : 제가 저번에 프로젝트 맥락이랑 뭐 해야 하는지 다 설명해 줬는데…


은경 사원 : 근데 제가 한 번도 안 해봤잖아요. 그래서 못하겠어요. 그냥 대리님이 하시는 게 더 빠를 것 같기도 하고 두 번 일 안 하는 거 아닐까요?


도윤 : 은경 씨. 그런 식으로 일을 회피하려고 하면 제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은경 사원 : 아니. 그러니까 제가 설명하잖아요. 저희가 일을 두 번 안 하려면 대리님이 해주시는 게 좋다니까요.


권 소장 : 뭐야? 둘이 싸워? 도윤! 은경 씨 너무 괴롭히지 말고 잘해봐.


도윤 : ….




녹음 003


도윤 : 제가 병원도 다니고 있고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해서 이 프로젝트는 감당이 안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권 소장 : 저번에 은경 사원 부쳐줬잖아? 그래도 못 해? 우리 도윤 대리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 


도윤 : 제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그거까지 다섯 개라서 도저히 감당이 안됩…


권 소장 : 너 이런 식으로 일 안 하면 내가 너랑 일을 어떻게 하냐.


도윤 : 저도 잘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안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권 소장 : 하아…. 그럼 회사 때려치워.


도윤 : 네?


권 소장 : 됐어. 조용히 하고 가 봐.


도윤 : ….



그 외에도 그들은 나를 대놓고 가스라이팅 하고 있었다. 권위적인 권 소장과 이기적이 차장님, 권호 대리님. 그리고 일하기 싫어하는 신입 사원까지. 그들은 나를 괴롭히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처럼 나를 대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권 소장님이 나에게 일을 많이 주는 건 팀 운영을 나를 주축으로 하겠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차장님과 권호 대리님은 항상 적당한 양의 일만 하려고 하니까. 그리고 나머지는 나에게 미루고 그걸 내가 해내니까 그렇게 시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은경 사원은 어려워하는 일을 내가 대신 해줘버릇했기에 조금만 어려워도 나에게 일을 미룬다. 이런 신입사원의 태도를 권 소장에게 말했지만 둘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은경 사원의 태도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상황을 이렇게까지 이끌어온 나의 잘못이 제일 크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먼저 화를 냈으면, 받아주지 않았으면 결국 이렇게 내가 망가지는 일도 없었을 텐데. 과거의 내가 원망스럽다.


그럼에도 정신과 선생님은 내가 모은 증거들을 잘 정리해서 인사팀에 신고해 보라고 하셨다. 나는 사실 그 기준(내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모호하다고 느껴져서 괜히 인사팀에 말했다가 봉변만 당하는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팀에서 배신자가 되고 신임을 잃고 결국 팀을 이동하다 자진해서 퇴사하게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 말이다.




사실 사건은 엇비슷하게 흘러갔다. 


처음 인사팀장에게 증거와 괴롭힘의 사실을 말하자 팀장님은 알겠다며 사건을 처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곧바로 권 소장이 이 사실을 알고 나를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상 권 소장의 일방적인 말 뿐이었다.


“도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보고체계 다 무시하고, 상사인 나에게 상담도 안 하고 바로 인사팀한테 꼰지른거. 솔직히 내가 그거 모를 줄 알았어? 이거 나 그냥은 못 넘어간다. 너 기대하고 있어.”


권 소장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알고 보니 인사팀장과 권 소장은 아주 오래전에 같이 입사한 동기였고 꽤나 자주 술을 같이 마신다고 했다. 나는 거의 울다시피 정신과 선생님을 다시 찾았고 선생님은 제3의 기관을 통해 신고를 하라고 하셨다.


나는 내가 피해자인데도 고통 속에서 가시나무 떨듯 떨어야 했다. 내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일은 내 살을 도려내는 일같이 아팠다.





결국 고용노동청과 지인이 연결시켜 준 공인노무사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통해 결국 나는 팀과 격리 조치되었고 괴롭힘에 대한 내부 조사와 외부 조사가 이어졌다. 위원회가 생겼고 내가 제출한 증거 외에도 주변 회사 직원들의 목격담이나 증언이 이어졌다. 물론 짧은 시간에 끝나는 싸움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우리 팀원들에게 징계조치가 이루어졌다. 차장님과 권호 대리님은 정직 처리가 되었고, 공채 신입사원인 은경 사원은 다른 팀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권 소장님은 감봉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나는 괴롭힘 가해자와 부딪히지 않도록 팀 이동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한마디로 우리 팀은 폭파되었다.





[ 퇴사 ]


매년 직원들이 새로 들어오고 나가는 회사에서는 팀 하나가 없어진다고 해서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회사는 이전과 다를 것 없이 돌아갔고 수주와 매출에는 영향이 없었다. 회사에 오고 가며 이전 팀원들을 마주쳤고 뻔뻔하고 당당한 그들과 다르게 나는 불편함을 느꼈다. 이런 우리 팀의 사건과 폭파 후 모습은 그냥 가십거리가 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가십거리는 감칠맛이 강한 마른 오징어 같아서 사람들이 씹기 좋아했다. 나의 이야기는 질겅질겅 씹히고 또 씹혔다.


나는 아직도 약을 먹는다. 직접적인 원인은 제거되었으나 증상이 회복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고 정신과 선생님은 친절히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심신의 안정을 다시 찾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내 증상이 완화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퇴사하기로 결정했다. 4년간 쉬지 않고 노력했던 것에 피로했고 내가 겪은 사건들이 나의 머리를 시끄럽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쉬어야겠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쉬고 싶었다. 만약 삶에게 입이 있다면 그 입을 닥치라고 하고 싶었다. 그저 아무것도 들리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진공의 상태에 나를 놔두고 회복하고 싶다.


돌아보면 첫 회사 생활은 성공하지 못했다. 성공이 아니면 실패겠지. 실패의 꼴이란 어쩌면 나의 노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그저 인생이 주는 꼬라지일 수도 있겠다.


나는 노력밖에 한 게 없는데 인생이 나에게 주는 꼬라지.


실패라는 꼬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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