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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Feb 11. 2023

입춘대래대래댓길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긴다.

2월 4일은 2023년 입춘이었다. 24절기 중 첫 번째라고 하는 입춘은 말 그대로 봄의 시작을 알린다고 한다. 나에게 음력이나 절기 같은 것은 낯선 개념이라 아직 한 겨울인 2월부터 봄 타령을 하는 게 이상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선조들의 지혜를 내 서른 남짓한 인생이 이길 수는 없는 것이었을까? 얼음장같이 춥던 날이 이상하게 따듯해졌다. 서울 최고 온도는 영상 5도에 육박하면서 드디어 패딩 지옥에서 코트 천국으로 넘어올 수 있는 온도 범위에 들어왔다. 룰루랄라 고이 묵혀놓았던 검정색 롱코트를 꺼냈다.


친구와 서울 근교 카페로 놀러 갔다. 역시 날씨가 따듯하니 많은 사람이 밖으로 나왔고 몇몇은 옥외활동도 즐기고 있었다. 나도 날씨가 따듯하니 마음도 들떠있었는지 기분이 좋았다. 카페를 나와 근처를 서성거리다 아주 동그랗게 떠오르는 달을 보았다. 친구에게 서둘러 저 달 좀 보라며 재촉였다. 친구는 오늘 유난히 똥그란 달이 뜨는 이유를 알려주었다. 오늘은 정월대보름이었다. 봄 같은 날씨도 모자라서 똥그란 달이 뜨는 날이라니. 서둘러 눈을 감고 손을 모아 달님에게 기도를 드렸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오늘은 밖에 나오길 참 잘한 것 같다.



월요일에도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다. 24절기, 입춘, 입추, 동지 이런 것들이 어떻게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현대사회에서 먹힐 수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현상적으로 믿게 되는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진짜 봄이라도 온 것, 마냥 햇볕은 따스했다. 오늘도 검정색 롱코트를 꺼내입고 홍대 입구로 향했다. 독립출판으로 출간했던 <퇴사 사유서> 2쇄를 뽑기 위해 여러 인쇄소를 전전하다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주시는 인쇄소 사장님을 만나게 되어 미팅(사람과 사람이 진짜로 만나는 meeting)하러 가게 되었다. 사장님의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을 한 시간 동안 듣고 가제본에 문제가 없으면 여기서 인쇄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고민이 하나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또 사장님이 클라이언트인 나를 대하시는 애튀튜드를 보고 나도 프리랜서로 취해야 하는 나의 애튀튜드에 대해 생각했다. 뭔가 이래저래 배우고 간다.


미팅이 끝나고 홍대 입구 근처를 돌아다녔다. 이쁜 엽서를 사야 했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겨서 엽서에 마음을 담아 전달해 줄 예정이었다. 무작정 돌아다니면서 엽서가 있을 법한 곳을 찾았다. 커피와 문구가 같이 있던 커피샵(coffee+shop)도 있었고 자잘한 굿즈를 파는 팦업샵(pop-up shop)도 있었다. 결국 열심히 구경하다 팦업샵에서 발견한  남색 배경에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엽서를 샀다. 1,500원을 쓰기 위해 40분을 넘게 돌아다녔다. 좋은 마음을 전하기 위해 엽서를 고른다는 건 즐겁고 따뜻한, 입춘 같은 마음이 드는 일이다.


집에 오는 길에 지하철역에 있는 도서 대여기에 잠시 들렸다. 마침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 내가 예약한 책이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대여기에서 로그인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하니 딸깍하면서 대여기 A-11 칸이 열린다. 그 안에는 오래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세스 고딘의 책이 들어있었다. 꽤나 두툼했지만, 이번에도 꼭 다 읽으리라는 다짐하면서 책을 들고 지하철 출구 계단을 신나게 올라간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긴다’라는 뜻의 한자를 써 놓고 대문에 붙여놓는 풍속이 있다고 한다. 새로운 계절, 새로운 해,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면서 뭐든지 잘되고 잘 풀리기를 기원하는 어리석지만 기분 좋은 풍습이다. 입춘이 되고 요 며칠 기분 좋은 일들이 일어나니 이 풍습을 왜 하는지 알 것 같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분 좋은 행운은 역시 인생 술술술 잘 풀리는 게 아닌가 싶다. 입춘으로 마음도 날씨도 따뜻해지는 요즘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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