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로 Dec 05. 2023

결혼 전으로 돌아갔다

유부녀의 해방일지(2)

다음 행선지는 구제샵이다.




옷을 좋아하는 나는 예전부터 옷을 사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는 했다. 한참 직장에서 힘들 때는 택배상자가 쌓여 있었고, 택도 떼지 않는 옷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모두 기부하고 나서는 입는 옷만 최대한 관리하면서 입기 시작했다. 새 상품을 사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문제는 구제였다. 구제는 새 상품도 아닐뿐더러 가격도 저렴해서 일종의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자기 합리화의  끝판왕이라고 할까나. 옷 리사이클링으로 환경 보호도되고, 가격도 저렴하고, 잘 보면 새 상품도 있고 원단이 매우 좋은 옷들도 있다.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신세계인 것이다. 물론 20대 초반에 돈은 없고 옷은 사고 싶을 때 구제를 한 번씩 보기는 했다. 그때는 구제샵의 옷은 대부분이 일본 옷이었기에 스타일이 한정적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세계각국에서 오기 때문에 정말 스타일 다양하다.


경기가 어려운 탓인지 사람들이 또 구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구제샵들이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러한 열풍에 힘입어 구제를 고급지게 빈티지 의류라고 부르며 MZ세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덕분에 나의 옷구경은 늘어만 갔다. 남편을 한 번씩 데려갔는데, 그에게 맞는 옷을 발견했을 때는 엄청 신나 했고, 구입까지 이어졌다. 그 옷들을 굉장히 잘 입고 다닌다. 나도 한 번씩 마음에 드는 옷들이 생기면 입어보고 구입을 해 지금까지도 잘 입고 있다. 이렇다 보니 한동안 둘이 신나게 옷을 보러 다녔다.  필요한 옷을 전부 구매한 남편은 어느새 관심이 시들해졌다. 그러나 나의 옷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구제샵에서 옷을 고르고 있자면 보물찾기 하는 기분인데, 잘 찾으면 정말 기가 막힌 상품들이 있다.





겨울이 다가오니 캐시미어에 꽂혔다. 그러나 캐시미어가 얼마나 비싼가. spa브랜드에서도 캐시미어 100% 제품은 20만 원 중반을 줘어야한다. 니트 하나에 20을 태워? 아직 간이 콩알만 하다. 코트와 패딩에는 돈을 주고 사는 편이나 안에 입는 옷을 몇 십만 원이 넘게 주고 산적이 없다. 그래서 구제에 캐시미어 100% 니트가 있으면 꼭 한번 사서 입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다니는 구제샵에서는 캐시미어 100% 니트를 본 적이 없다. 이 사장님의 취향은 보통 아우터들에 집중되어 있다. 다소 아쉬워 다른 곳에도 몇 번 가보았지만 전부 보세이거나 브랜드라도 모가 섞여있는 정도였다. 모가 섞이는 순간 따가워서 맨살에는 입기 힘드니, 바로 포기하게 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정말 허름한 구제샵이 보였다. 평소에 지나가는 길에 한두 번씩 보았는데, 정말 동묘 길거리에서 펼쳐놓고 파는 정도의 퀄리티 느낌이 물씬 나 들어가 보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기분 탓인 건지,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매장이 생각보다 컸고, 옷의 종류가 크게만 분류되어 있을 뿐 행거하나에는 셔츠 니트 카디건 블라우스까지 빼곡하게 전부 걸려있었다. 정말 이곳이야말로 제대로 된 보물찾기를 할 수 있는 곳 같았다. 안쪽으로 들어가 행거 하나를 쑥 보는데, 촉감이 남다른 니트가 하나 걸렸다. 혼용율을 보니 캐시미어 100% 니트였다. 이게 무슨 횡재람. 그 행거를 조금 더 보다 보니 비슷한 촉감이 걸려 또 보았더니 캐시미어 100% 니트였다. 욕심을 내  반대 행거 쪽을 한번 보고 나서 오늘의 운은 여기까지만 쓰자고 생각했다. 캐시미어 니트를 두 개 들고 갔는데, 하나 팔 쪽에 구멍이 나있는 게 아닌가. 사장님에게 슬쩍 이야기했다.


"사장님 니트 두벌에 얼마예요?"


"니트 하나당 5,000원이니까 만원 주세요."


(속으로 생각했다. 여긴 그냥 균일가구나.)


"어, 사장님 여기 니트 하나에 팔 보시면 구멍이 나있어요."


"어라. 진짜네. 저희는 이런 물건은 안 팔아요. 이리 주세요."


"저기 사장님 어차피 안 파시는 거면 덤으로 주시면 안 되나요?"


"아니, 우리 영업비밀이라 안되는데 이것도 나중에 따로 팔아요."


"구멍 난 걸 어떻게 팔아요. 아까는 못 파신다고 해놓고선."


"아. 정말 고민인데... 그럼 그냥 5000원만 입금해 주세요. 두 개 들고 가요."


"감사합니다. 잘 입을게요."


안 그래도 캐시미어 100% 니트를 구하기도 어려운데, 2개나 봐서 신봤다 생각했다. 다른 구제샵은 옷마다 소재와 디자인을 보고 가격을 다르게 매겨놓는다. 그러나 여기는 정말 동묘시장 길바닥 같이 균일가였다. 안 그래도 구제샵에서 캐시미어 100% 니트를 아무리 싸게 사봐야 3만 원인데, 오천 원이라니. 그런데 마침 구멍이 작게 나주니 공짜로 하나 얻었네. 바느질해서 입어야지. 기분 좋게 들고 와서 브랜드를 쳐보니, 세상에나 골프 브랜드 니트라 꽤나 비싼 니트가 아닌가. 새 제품은 50만 원대 형성이 되어있고, 오래된 중고 마켓에서도 기본 7만 원 이상이었다. 보들보들 촉감도 좋다. 중성세제로 손빨래를 해서 널어놓으니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시미어도 등급이 많다고 하는데, 아직 그 정도는 모르니 우선 구제로 경험해 보자. 맨살에 입으니 구름을 한 겹 두른 것같이 가볍고 폭신하다. 이래서 다들 캐미시어 타령을 부르는구나 알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꽤나 몸이 피곤했다. 뜨끈한 물에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느긋한 시간. 최대한 만끽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샤워만 한 시간째다. 샤워하면서 그동안 못한 화장실 청소도 하고, 거실 실내화도 빨고, 걸레도 빨 아재 낀 탓이다. 내 몸도 내 몸인데, 평소에 힘들어서 하지 못했던 집안 구석구석이 보였다. 덕분에 내 몸을 씻으러 갔다가 다른 애들 때도 벗겨주었다. 걸레도 널어주고, 실내화도 집게로 빨랫대에 걸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기분 좋게 온몸에 바디로션을 챙겨 발라줬다. 꼼꼼하게. 혼자 있으니 괜히 향수도 뿌리고 싶다. 좋아하는 향수를 두 개 정도 골라 칙칙 뿌려준다. 누군가를 위한 향이 아니라 오롯이 나를 위한 향을 섞어본다. 상쾌하고 분위기 있다. 뭔가 있어빌리티 한 여자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들떴다.


10시가 넘어가고 있는 시간. 저녁에 이렇게 혼자 여유를 부렸던 적이 있나. 나는 어느새 좀 출출해져 식빵 2개를 계란물에 묻혀 골고루 익혔다. 작은 접시에 꿀을 조금 덜고, 유리컵에 우유를 따랐다. 그리고는 유튜브에 연애의 참견이라고 쳤다. 아, 이것은 결혼하기 전 혼자 있을 때 주말 루틴이다. 식빵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꿀을 찍어 먹었고, 간간히 우유를 마셨다. 연애의 참견에서 나오는 사연을 보며 함께 분노하고 속으로 이게 말이 되는 건가 혼자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12시. 대충 정리하고 드디어 낮에 다이소에서 득템을 했던 VT 니들샷 100을 발라본다. 와. 처음에 바를 때는 모르겠으나 얼굴에 롤링을 해줄 때마다 점점 따가워져 온다. 따끔따끔한 게 남다르다. 이야. 꽤나 아픈걸. 그래도 내 얼굴에 뭔가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꽤나 뿌듯해졌다. 오래간만에 나를 가꿔주는 기분이랄까. 결혼 전에는 가끔 피부과에 가서 보톡스도 맞고, 리프팅시술도 받았다. 결혼을 하고 나니 혼자만을 위해 피부과를 가기에는 다소 눈치가 보였다. 남편은 운동을 꾸준히 하는 사람이라 늘 내게 말하는 바는 운동을 하면 피부탄력은 저절로 생긴 다였다. 남편은 피부과를 가라고 말하지만 사실 운동을 같이 하길 바라는 마음이 늘 저변에 깔려있다. 그 마음을 아는데 어떻게 피부시술을 받으러 다니겠는가.


여하튼 얼굴에 기특한 짓을 해주고 나니 조금은 예전의 나로 돌아온 것 같아 좋았다. 이대로 자기가 너무 아쉬웠다. 누워서 딩굴딩굴하고는 유튜브 영상을 틀어놓고 딴짓하다 보니 3시가 되어간다. 이제 정말 자야 한다. 내일 몇 시에 일어나려고 이런 짓을 하는지.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내일 오전을 알차게 보내야 하는데, 자다가 끝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얼른 폰을 내려놓고 불을 끄고 잠이 들었다.



내일은 뭘 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유부녀의 해방일지(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