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로 Jan 10. 2024

5급 꽃가루 알레르기 환자가 꽃을 선물하면?

일전에 썼듯이 남편은 애초에 꽃을 사주지 않는 남자였다.

꽃 사주는 것이 뭐가 그렇게 어려운가.

그 뒤로는 꽃을 사달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


https://brunch.co.kr/@cheer--up/59


내가 꽃구경 가는 것도 좋아하고, 집안에 식물도 많이 키우는 것을 남편이 자연스럽게 알게 되면서

어느 순간에 남편도 식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길을 지나가다가 한 번씩 '이 나무는 뭐야?, 이 풀은 뭐야?, 저 꽃은 특이하게 생겼다.'

도통 관심이 없던 사람이 나로 인해 궁금해하는 것이 신기했다.


내가 꽃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그가 식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과는 별개로

그에게는 아주 심각한 고질병이 하나 있다.

바로 꽃피는 계절만 되면 심각한 알레르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눈이 가렵고, 콧물이 줄줄 흐르고, 코는 항상 막혀있으며, 잔기침을 한다.

목에 이물감이 들고, 부어있어 컨디션이 늘 난조다. 그나마 마스크를 쓰면 증상은 호전된다.

누가 봐도 꽃가루 알레르기였다.


일 년을 지켜본 결과 증상이 꽤나 심각하여 이비인후과를 찾아 MAST알레르기 검사를 받아보았다.

채혈을 하여 어떤 부분에 알레르기 현상이 일어나는지 검사하는 것이다.

class0~6단계까지 있는데, 여기서 5~6단계를 받으면 반응이 심각하니 피하거나 먹지 말아야 한다.


남편은 고양이, 복숭아, 호두, 집먼지, 꽃가루에서 5단계를 받았다.

의사는 절대 먹지도 말고 가까이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꽃가루는 봄에 어쩔 수가 없으니 잠시 약을 복용을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남편의 알레르기에 반응하는 음식을 알았으니 주의하고, 집안도 물걸레질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했다. 아, 평생 꽃선물은 못 받겠구나.


그 뒤로 조용히 지낸 어느 날, 남편은 특별한 이벤트가 없이 프리지어 한 단을 선물해 주었다.

그는 내가 프리지어를 좋아한다고 연애시절에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 무렵 남편은 장기 출장이 예정되어 있었다.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니 미안하다며 꽃을 선물해 준 것이다. 

프리지어는 처음에는 봉오리가 지어있지만 물 올림을 하고 나면 활짝 피고 향기를 뿜어댄다.

다행히도 꽃잎이 벌어질 무렵 그는 출장을 가 알레르기를 피할 수 있었다.


남편은 꼭 무슨 정해 놓은 것처럼 꽃을 분기별로 사주었다.

전부 꽃말을 찾아두었다가 그 꽃이 나오는 시즌에 내게 선물했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수술이 드러나지 않는 꽃을 위주로 선물했기에 그에게 큰 알레르기 반응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 크리스마스가 문제였다.

그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여러 가지 꽃이 섞인 크고 풍성한 꽃다발 선물을 준비했다.

파스텔계열의 꽃들을 알록달록 예쁘게 믹스 매치한 꽃다발이었다.

좋은 날에 좋은 선물이니 고마워하면서 받았다.


그런데, 남편은 크리스마스 이후부터 점점 아파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콧물이 나고 목이 붓기 시작한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기분도 낼 겸 함께 놀고 왔는데, 너무 추웠던 탓에 감기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콧물약과 목감기약을 먹고 잤는데, 여전히 그의 증상은 심각해지기만 했다.

감기면 나도 같이 걸려야 하는데, 나는 너무 멀쩡한 게 이상했다.


그렇게 점차 증세가 악화되던 3일째 되던 날

약을 먹고 누워있었는데, 뇌리에 스치는 생각 하나.

설마 저 꽃다발?


나는 꽃다발을 오래 보기 위해 열처리까지 하고 화병에 예쁘게 정리해 두었다.

아침마다 물을 갈아주며 하루하루 행복하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저 꽃다발이.... 저 꽃가루가.....



그 꽃다발에는 노란수술이 활짝 드러나있는 국화과의 꽃이 있었다.

남편에게 이야기한 후 동의 하에 서로 마음이 좋지 않지만 꽃다발을 버리기로 하였다.

내가 꽃다발을 고이 쓰레기봉투에 넣어 잠갔다. 

그리고 화병을 씻고, 주변에 꽃가루가 있을 만한 곳을 닦아냈다.

남편은 온 집안에 문을 열고 물걸레질을 하였다.

본의아니게 집안 대청소를 했다.


놀랍게도 그의 콧물과 목 이물감, 눈이 빠질 것 같은 두통은 한 시간 내로 사라졌다.

4시간 후에는 정말 급격히 호전되어 다시 일상생활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컨디션을 빠르게 회복했다.


아.... 윽고 편의 한마디


"고맙고 미안해

근데 이제 숨이 쉬어져!!!!

정말 살 것 같아!!!!"


그래... 남편이 살 것 같다니 그걸로 됐다. 그래도 꽃을 선물하는 그의 노력에 감사하며 속으로 이야기했다.


'안녕 꽃다발'


웃프다....ㅜㅜ



매거진의 이전글 파혼한 여자의 연애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