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시고 이주가량이 지났다. 난 오십이 다 돼 고아(孤兒)가 된 기분이다. 고아의 정의가 정확히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님이 모두 죽었다면, 왠지 나이에 상관없이 그것이 '고아됨'의 조건인 거 같다. 곁에 있어 줬던 형제들이 자신이 일군 가족의 세계로 건너간 후 8개월 동안 엄마의 유일한 식구(食口)로 함께 기거했던 좁은 아파트에 홀로 남겨진 지난 이주는 번잡하고 분주했다. 밥을 같이 먹던 유일한 식구를 잃은 난 그 식구를 행정과 금융의 네트워크 속에서 지워나가는, 부재를 증명하는 절차를 무람없이 꾸역꾸역 잘도 해냈다. 빨리 해치워야 하는 방학숙제처럼 자꾸만 서둘렀다.
누나와 아빠가 사라졌을 땐 경험하지 못했던 사망신고라는 잔인한 절차를 엄마 덕분에 겪어냈다. 그건 놀랍도록 간단하고 건조했다. 신분과 사망 확인을 위해 신분증과 사망진단서가 창구에 건네지고 몇 가지 서류 작성 후 죽음의 신고는 간단히 처리됐다. 엄마의 육체가 지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행정 서류에서도 엄마를 당연히, 마저 서둘러 쫓아내는 것 같아 엄마에게 미안함 맘이 찾아들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의 사망신고는 결국 살아남은 '나'를 위한 것이어서 뻔뻔하고도 꼼꼼하게 잘도 해냈다.
엄마는 시골에서 올라오신 후 오랫동안 서울의 북쪽에서 생활을 이어가셨고 이곳이 재개발된 후 힘겹게 임대 아파트를 쟁취해내셨다. 맞다, 그건 쟁취였다. 집을 팔고 전세로 오랫동안 사셔서 아파트를 분양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이셔서 **주택공사 관계자들을 굴복시키시고 작지만 온전한 엄마의 공간을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내셨다. 이 과정에서 자식들이 힘이 되어준 건 1도 없다. 다니시는 교회와 가깝고 오랫동안 삶의 터전이셨던 곳, 바로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몸을 누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감개무량하시던 십 년 전 엄마의 얼굴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나는 삼십 대 이후로는 반쯤 한량처럼 지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채 여행도 자주 하며 이곳저곳 거처를 옮겨 살아왔다. 성실하게 가정을 일구고 '서울에 집 한 채 마련'이라는 표준화된 어른들의 꿈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은 진즉 개나 줘버렸다. 막둥이는 엄마에게 그래서, 그렇게 맘을 까끌거리고 불편하게 만드는 걱정스러운 아들이었다.
그런 막둥이가 엄마 집으로 작년 말 제 발로 들어갔다. 엄마가 잡아 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고집해서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 흘러 들어갔다. 연로하신 엄마가 혼자 살아가는 모습이 자식으로서 안타까워 합쳤다고 대외적으로는 말하고 다녔지만 정작 엄마는 오랫동안 혼자 잘 살아가다 맞은 웬 날벼락이셨다(는 것이 엄마가 남긴 다이어리에서도 확인이 됐다.) 하지만 엄마는 티 내지 않고, 혹시 엄마가 여기 살다 죽으면 내가 집을 승계받도록 미리 들어와 사는 건 날 위해 좋은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가진 돈과 능력으로 전세로라도 엄마가 사는 집 정도의 아파트를 서울에 구한다는 건 요령부득한 얘기이므로, 솔직해진다면 엄마나 형제들이 아파트 승계 얘기를 꺼내 준 게 내심 난 고마웠으리라. 참, 못났다.
엄마가 모든 문서에 공식적으로 '사망'이라고 적힌 첫날, 난 **주택공사 사무실에 들렀다. 엄마와 내가 식구로 함께 한 집에 살았으며, 엄마는 이미 죽었고 다른 형제들이 집에 대한 상속을 포기한다는 걸 증명하는 한 무더기의 난생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온갖 증빙서류를 담당자에게 내밀었다. 미비된 서류가 있어 다시 주민센터로 빗속을 뚫고 달려가 받아오는 난리법석을 한바탕 치른 후, 공식적으로 아파트 임대 계약서에 엄마를 지우고 그 위에 내 이름이 덧입혀졌다. 부끄럽지만 솔직해지자면 다행이다 싶었고 좋았다. 문제가 생겨 집 승계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내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게 너무 빠르다. 엄마는 8개월이면 충분히 불편하게 아들하고 살아준 거라 생각하신 걸까. 이제 좀 편하게 각자 살아가자고 그렇게 홀연히 오랫동안 차곡차곡 기도라는 벽돌로 쌓아 올리신 본향 집으로 돌아가신 걸까. 좀 깔끔하고 뽀대 나게 살자고 지난겨울 엄마 집으로 들어오면서 환골탈태시켜 놓은 집안 곳곳이 외려 허허롭게 다가올 뿐이다. 새로 짠 미닫이 붙박이장과 장식장, 새로 산 드럼세탁기와 건조기, 위니아 에어컨까지, 일 년도 못 누리시고 얼마나 더 좋은 곳이길래 엄마는 그렇게 독립해서 서둘러 나가신 걸까.
지워진 엄마 이름 위에 내 이름을 새겨 넣고 돌아오는 길, 아파트 입구 재활용 처리장에 일주일 넘게 쌓여 있던 폐기물이라 불리는 엄마의 흔적들, 그러니까 엄마의 이불과 옷가지들 그리고 아끼던 옥장판 등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그나마 오가며 아프지만 엄마의 존재를 증명해주던 흔적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엄마가 나서서 엄마 성격대로 깔끔하게 스스로를 정리해버린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막내아들을 위해 정리하지 못하고 남겨놓은 유일한 그 하나가, 집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맘이 착잡하기 그지없다. 엄마가 이곳을 떠나면서도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시고 자식의 살아갈 집 걱정을 하셨을 것만 같아 죄송스럽지만 또 감사하다.
누군가에게는 이 집이 가난한 자들의 좁고 보잘것없는 임대아파트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을 얻기 위해 엄마가 치러내셨을 고난과 투쟁 그리고 십 년간 또 누리셨을 안식을 생각해 보면, 이 집이 바로 엄마란 생각이 든다. 아무리 엄마의 유품을 치우고 정리했다 해도, 부지런히 집안 곳곳을 종종걸음으로 옮겨 다니시면서 내쉰 호흡과 체취가 벽마다, 창틀마다 스며들어 있는 듯하다. 그러니, 서류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결국 엄마의 집, 아니 엄마 그 자체 안에서 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영원히라도 상관없고, 한동안이라도 상관없다. 지금은 엄마가 집이 되어 줘서 많이 울지 않는다. 그냥 엄마랑 함께 살고 있을 뿐, 엄마를 느낄 뿐, 울지 않고 씩씩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곳이 엄마의 집이 아닌, 너무 변해버려 엄마가 느껴지지 않는 나의 집이 되어버리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때 다시 더 많이 아플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엄마에 대한 애도의 기회를 미뤄두는 게 더 큰 후폭풍으로 날 부셔놓을지라도, 오늘은 일단 숨 쉴 수 있다. 덜 울고 덜 아프고 엄마를 그냥 느끼며 천천히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아무래도 나도 엄마도 아직은 서로가 완전히 독립할 준비가 덜 된 것 같다. 8개월은 우리가 다시 식구가 되어 맘껏 짜증내고 웃고 사랑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으니까. 다시 만난 것도 아직 서먹한데 벌써 헤어지다니, 너무 무심하고 때 이른 이별 아닌가.
이제 난 내 방식으로 엄마를 떠나보내야겠다. 이 집이 엄마 아닌 자질구레하고 지질한 일들로 넘쳐날 때, 그때서야 다시 엄마와 이 집에서 헤어질 맘을 단단히 먹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엄마와 난 이 집에서 아직 헤어진 게 아니다,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