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잃은 지 어제가 100일째다. 오늘은 101일이고 내일이면 102일이다. 그렇게 숫자만 세다 보면 천일도 만일도 금세일 듯싶다.
잃었다,고 쓰고 보니 좀 머쓱하다. (지금의 당신처럼) 날 잘 모르는 누가 보면 내가 엄마를 생전에 몸이나 마음 가까이에 두고 닳도록 품고 살았는 줄 알겠다. 아니다, 난 미끄러지며, 다시 또 미끄러져 들어오며 그렇게 엄마라는 자장의 맨 가사리만 죽자 사자 맴돌며 살았다. 먹고살기 위해 아이들이나 아이들보다 못한 어른들 앞에서 광대짓도 마다치 않았지만, 엄마 앞에선 잘도 매정하게 굴었다. 그랬던 내가, 지난 백일 동안 단 하루도 엄마를 생각하지 않고 지나쳐 보낸 날이 없었다니, 나도 이런 나는 예상치 못했다. 그러니, 백일이 흘렀단 게 믿기지가 않는다. 어제의 기억인 듯 매일처럼 엄마가 죽은 그날, 그 전날, 그다음 날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다 일상의 내 사고는 정지돼버리곤 했다. 백일이 아니라 하루를 백일처럼 살아낸 기분이다.
지난 두 달 동안 먼 타국의 길 위를 걷고 또 걸었다. 혼자 오롯이 걸을 때, 몸의 곳곳에서 찾아든 고통이 인장처럼 내 이마에 새겨지는 기분이 들 때조차 엄마는 그 고통과 겹쳐서 찾아오곤 했다. 내 맨 등짝을 뾰족한 쇠구슬이 박힌 채찍으로 있는 힘껏 휘두르며, 살을 찍어내며 걸어가고 싶기도 했다. 그 정도 되면 엄마가 내 의식의 표면에서 미끄러져 가시려나.
의식은 차치하고 엄마는 내 꿈속조차 점령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 정확히는 엄마라고 날 겁박하는 꿈속 이미지들이 날 아프게 했다. 어떤 날은 너무나 생생하게 내 손바닥으로 전해져 오는 꿈속, 엄마의 검버섯 가득한 두 손의 촉감에 놀라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기도 했다. 그리고 슬픈 건지, 두려운 건지, 고통 때문인지, 그리움에서인지, 다시 감긴 눈꺼풀 아래로 불룩하게 눈물이 차오르곤 했다.
지난 100일, 나는 온통 엄마이고 엄마의 죽음이다. 내 의식과 의식의 경계 너머 그 모호하고 탁한 무의식 속에서조차도.
집으로 엊그제 돌아왔다. 엄마가 곳곳에 버젓이 드러난 집으로 돌아오니, 직면하고 나니 차라리 편안하다. 물러설 곳이 없는 이 벼랑 끝이 되려 안전하다. 움막을 짓고 죽은 부모의 묘를 지키며 삼년상을 치르던 옛날 사람들이 오히려 현명해 보인다. 천일 동안 그 슬픔은 안전하게 봉인됐을 테니, 그 고통을 애써 숨기지 않고 바닥까지 겪어냈을 테니, 산 사람은 살아야 된다는 헛된 위로들로부터 멀찍이 도망칠 수 있었을 테니.
바라건대, 엄마와의 기억이 더이상 죽음 주변에만 고인 채 맴돌지 않기를 바라본다. 더 과거로 흘러, 더더 과거로 흘러,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시간 속, 늘 엄마가 그리워하시던 엄마의 엄마가 있어, 나의 엄마가 봄처럼 따스했고, 꽃처럼 화려했으며, 보석처럼 소중히 다뤄졌던, 그날들로도 이어졌으면 하고 바라본다.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다. 이백일이 되고 삼백일이 되어, 엄마가 엉망인 맞춤법으로 써놓은 저 옷장 구석에 놓인 다이어리를, 삐뚤빼뚤 이면지에 써 내려간 엄마의 육필 시들을 읽어나갈 용기가 생긴다면 말이다.
두 시간 뒤면, 다시 어제의 기억이 102일째 날 찾아올 것이다. 103일째에도, 104일째에도, 그리고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