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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May 13. 2020

시나브로의 힘

천재성보다 대단한 꾸준함의 능력에 대하여

고등학생 때부터 나는 작가라는 직업을 동경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 동그란 안경을 쓰고 부스스한 곱슬머리에 모두가 잠든 새벽에 밝은 노트북의 화면과 마주하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손가락으로 하나씩 글자를 입력하는 사람. 흰 화면을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문자’라는 도구를 통해 검은색 글자로 채워나가는 모습은 나에게 있어서 붓을 들고 화려한 색깔로 흰 도화지를 색칠하여 명작을 탄생시키는 화가의 모습처럼 멋져 보였다. 그렇게 나는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갔다. 나는 내가 언젠가 작가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꿈은 꿈을 꿀 때 가장 아름답다고 했던가? 그렇게 꿈과 희망만을 가진 채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글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4년을 보냈다. 그리고 졸업.


사실 난 내가 무엇을 쓰고 싶은지 몰랐다. 그저 작가라는 직업이 멋있어 보였고, 똑똑해 보였고,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 같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글을 써서 책을 만드는 건 천지차이라는 걸 차츰 깨닫게 됐다. 독자는 문자를 해독하고, 작가가 고심하여 표현한 비유에 무릎을 탁 치며 좋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책을 덮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작가는 내가 하루 종일 읽기만 해서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버릴 수 있는 그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매일 자기 자신과 씨름한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탄생시킨 한 문장 한 문장이 모여서 한 권의 책이 되기까지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린다.


영화 <러빙 빈센트>의 장면들. 이 영화는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유화 애니메이션의 형태로 표현해냈다.


어떤 작가는 평생을 바쳐 한 작품을 완성시킨다.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표현할지,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이해할 수 있고 재밌게 읽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하루 종일 겨우 한 문장, 한 페이지를 완성한다. 난 그동안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는 뭐든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없는데. 작가는 평생을 노력해도 본인이 원하는 경지에 오를 수 없다. 여기에서 ‘노력’은 매일 하루에 8시간 이상 그 일에 매달려야 된다는 걸 의미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일정한 시간 동안 규칙적으로 꼭 글을 썼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는 매일 아침 8시에 초원으로 나가 그림을 그렸고, 오후 5시에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보냈다. 우리가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고 여기는 작가들은 매일 일정한 시간 동안 꾸준하게, 9 to 6의 하루를 보내는 일반 직장인들의 삶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하고 규칙적인 하루를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꾸준히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우리가 매일 운동을 해서 근육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시나브로’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뜻을 가진 순 우리말이다.


사람들은 예쁘고 날씬한 몸매를 가지기 위해서 매일 꾸준히 조깅하고, 근력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매일 일정한 시간 동안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쉬운 방법을 찾아 살을 빼기 위해서 다이어트 보조제를 먹고, 성형외과에 가서 특정 부위의 지방 제거 수술을 감행한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뺀 살은, 요요가 되어 다시 돌아올 뿐이다. 꾸준한 운동으로 튼튼해진 몸은 기초대사량이 올라가고 근육량이 많아져 쉽게 살이 찌지도 않고 예쁜 몸매와 건강한 삶을 살게 해 준다.


난 꾸준함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난 나 자신을 극히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학창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이었지만 공부를 특출 나게 잘해서 명문 대학에 입학한 것도 아니고, 활발한 사회성에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주변에 친구들이 많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예쁜 외모와 몸매를 가지고 있어서 인기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난 어느 하나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저 뭐든 열심히 노력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난 운동을 좋아하게 되었다. 운동은 정말 정직하다. 매일 빠지지 않고 30분이라도 운동을 하면 몸이 건강해지는 변화가 생긴다.


운동을 매일 하다 보면 '시나브로' 변화가 생겨서 어느샌가 내 몸을 보면 배가 단단해져 있고, 허벅지는 얇아져 있다. 난 이렇게 내가 꾸준히 매일 하기만 한다면 나에게 그 노력의 대가를 정정당당하게 가져다주는 운동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빠가 초등학생 때 가족 신문을 만드는 숙제가 있을 때마다 가훈으로 써냈던 ‘정직, 성실’이라는 가훈이 그때에는 정말 진부하고 지루한 단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모두 어린 시절에 배우는 것들이 아닐까?




글을 쓰는 것은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내 글을 써서 남에게 보여주는 건 정말 부끄럽게 생각했다. 난 특별한 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쓴 글도 특별하거나 좋지도 않고, 나의 치부를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운동을 통해서 깨닫게 된 내가 가진 ‘꾸준함’이라는 능력이 글을 쓰는 데 사용된다면? 내가 꾸준한 운동으로 지금의 튼튼한 몸을 만들었듯이 난 튼튼한 글을 쓰게 될 수 있을까? 그 ‘꾸준함’이라는 능력은 내가 가진 능력 중에 정말 특별한 능력임을 글을 통해서 다시 나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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