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바이 싸바이, 타일랜드
사람의 기분은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비가 오는 날에는 좀 기분이 가라앉고, 센치해지고, 쌀쌀한 가을이 되면 괜히 옆구리가 시리고 쓸쓸함을 느낀다. 그리고 날씨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 반경도 달라진다. 추운 겨울이 되면 따뜻한 집안에서 이불에 몸을 돌돌 감고 귤을 까먹으면서 영화를 보는 일이 많아지고, 봄이나 가을이 되면 야외 활동하기에 딱 좋은 날씨가 되니, 벚꽃 구경하러 단풍 구경하러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닌다.
나는 여름에 태어났고, 한국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계절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항상 여름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여름의 그 청량함, 밝고 신나는 음악이 종일 울려 퍼지는 길거리, 시원한 빙수, 짧은 반바지와 나시티, 약간 덥지만 왁자지껄하고 활발해지는 여름밤을 좋아한다. 그래서 항상 여름 나라에 한번 살아보는 것을 꿈꿨었다. 처음에 태국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됐을 때, 드디어 내 꿈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뻤고 설렜다.
태국의 날씨는 둘 중 하나다. 너무너무 덥거나 혹은 너무너무 변덕스럽게 비가 자주 오거나. 태국의 일 년 내내 지속되는 너무 더운 날씨는 태국 사람들을 '싸바이 싸바이'하게 만들었다. '싸바이 싸바이'는 한국의 '빨리빨리' 습성과는 다른 태국 사람의 성격을 이야기할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싸바이(สบาย)'는 직역하자면 '편안함'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태국 사람들은 평소에 인사말처럼 '싸바이디마이?', 즉 '지금 편안해? 괜찮아?' 라고 자주 습관적으로 묻곤 하는데, 그만큼 태국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더라도 '편안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는 한 달이면 끝날 보수 공사가 지금 6개월째 진행되고 있다. 한국 사람인 내가 보면 '후딱 해치우고 쉬는 게 낫지 않나?' 싶은 것도 태국 사람들은 날씨가 너무 더우니 쉬엄쉬엄 느릿느릿하는 편이다. 이런 태국 사람의 성격도 이 더운 날씨가 영향을 지대하게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사실 이런 태국 사람들의 성격이 처음에는 답답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좀 살다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나도 세븐일레븐에 잠깐만 커피를 사러 나갔다 와도, 땀으로 온몸이 흥건하고, 하루라도 '아, 더워 죽겠다'를 말하지 않은 날이 없으니까. 내가 태국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이 더위에 내 발걸음이 도저히 빨라질 수가 없었을 것 같다.
변덕스럽게 비가 오는 날씨는 태국 사람들의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느긋한 성격에 영향을 준 것 같다. 며칠 전에 태국인 친구랑 같이 바다 근처 카페에 갔는데 커피도 팔고, 칵테일도 팔고, 음식도 파는 그런 곳이었다. 앉아서 음악을 듣고, 근처 시장에 가서 쏨땀하고 허이톳(태국의 oyster pancake)을 사서 나눠 먹고 있는데, 갑자기 청명하던 하늘이 순식간에 먹구름이 가득 차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일을 계속하거나,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비를 피해 앉았다. 자연의 변화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으니, 비의 변덕에도 놀라지도 않고 그저 평화롭고 느긋하게 수긍하며 지내는 사람들.
그리고 다시 비가 그치고 우리 앞에 펼쳐진 광경은 바다 위로 커다랗고 높게 펼쳐진 아름다운 무지개였다. 다들 비가 온 뒤에 이 무지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비가 왔을 때처럼 담담하고 조용하게, 무지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