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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Feb 23. 2022

태국의 비 오는 날

전쟁 난 거 아니에요, 그냥 비 오는 거예요

태국 일기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비 오는 날'로 정한 건,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시점에서도 비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비는 평소와 다르게 아침부터 지금까지 하루 종일 내리고 있다. 원래라면 태국의 비는 변덕이 정말 죽 끓듯이 해서 30분 단위로 왔다가 그쳤다가 반복하는데, 가끔 이렇게 천둥소리를 동반하며 하루 종일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도 있다.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이번 주 내내 비가 온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 이 일기예보에 대한 신뢰도는 거의 0%에 가깝다. 왜냐하면 저번 주부터 계속 비가 온다고 했었는데, 요 며칠 동안은 비가 오기는커녕 날씨가 아주 아주 화창하고 맑았다. (그냥 죽을 듯이 덥고, 덥고 더웠다)


한국은 사계절이 있어서 그만큼 날씨 변화가 많고, 날씨를 표현하는 단어들도 풍부하다. 사계절이 있다는 건, 계절마다 옷을 바꿔 입어야 하는 귀찮음 또는 날씨 변화가 큰 날에는 감기에 걸릴 걱정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만큼 다양하게 변하는 자연을 누릴 수 있고 계절별로 먹는 음식도 다채롭고 풍부하다. 그리고 계절별로 친구, 가족들과 놀거리들도 달라서 1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다. 한국은 계절별로 날씨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의 비를 관찰할 수 있기에 한국어에는 비를 표현하는 많은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이슬비, 가랑비, 소나기, 여우비, 보슬비, 밤비, 진눈깨비, 장대비 등이 있다.




하지만 태국은 한국과는 다른 '삼(3) 계절'이 존재한다. 덥고, 너무 덥고, 너무너무 더운. 거기에 좀 더 보태면 우기(raining season)가 있다. 태국의 비 스타일을 정의하자면, 소나기의 5배 정도 강력한 빗방울이 30분 정도 짧은 시간 동안 우다다다 쏟아지는 스콜성 소나기 스타일이 거의 태국 비의 99%를 차지한다. 태국의 빗방울은 실제로 맞으면 정말 따가울 정도로 세차게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 꽂힌다. 마치 '빗방울'이 아닌 '빗바늘' 같다. 그렇게 30분 정도 짧게 내리꽂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맑은 하늘로 바뀐다. 가끔 기분이 좋았다가 화를 냈다가 하는 나를 보고 남동생은 조울증이냐며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는데, 이 조울증이 자연화된 게 태국의 비 같다. 나를 보는 동생의 기분이 이런 거였구나. 동생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집 앞 사거리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고 거리는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처음에 내가 태국에 왔을 때가 10월이었는데, 그때가 딱 우기 시즌이었다. 처음 태국의 비를 마주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오토바이 소리만 간간히 들리던 조용했던 창문 밖 너머로 갑자기 천둥 번개 소리가 크게 들려서 순간 전쟁이라도 났나 싶어서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깜짝 놀란 마음을 붙잡고 밖을 확인해봤더니 그건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천둥 번개 소리도  아니고, 바로 빗소리였다. 우기에 비가 갑자기 많이, 그것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쏟아지는 날이면, 도로가 쉽게 범람한다. 도로 위를 달리던 자동차들도 바퀴가 다 잠긴 채 느릿느릿 앞으로 전진하고, 길을 걷던 사람들은 갑자기 비의 미로 속에 갇힌 채 걸음을 멈추거나 다리가 잠긴 채 수영하듯이 걸어간다. 나는 처음에는 태국의 비에 충격을 받았지만, 어느새 비가 쏟아지는 출근길에는 쪼리를 신고, 도로 위에서 빗물에 발을 씻으며 출근을 하고, 일터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구두로 갈아 신고, 엄청난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들으며 일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점점 태국 사람처럼 되어가는 나 자신을 볼 때마다 웃기기도 하고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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