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는 유서 깊은 사기극이다. 누군가 헤게모니를 거머쥐기 위해 꾸며낸 것이 대다수가 믿고 있는, 일종의 도그마로 발전한 것이라고 추정해 본다. 이 멍청한 신념을 대하는 자세는 권력의 층위에 따라 달라진다. 우선, 지배자들이다. 이들은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개념 자체가 지닌 모순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용한다. 한 마디로 '의도'가 있는 자들이다. 세상에 '오르지 못한 나무'는 있어도 '오르지 못할 나무'는 없다. 올라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오르지 못할 것을 알겠는가? 권력자들은 마치 에셔의 판화 속 아이러니를 즐기듯, 시도도 해보지 않고 지레 안 될 거라 생각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다. 사람들이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생각하는, 그 나무 꼭대기에서 말이다.
다음은 엘리트다. 이들은 오르지 못할 나무는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가진 것이 많다.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잃을 것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콘크리트를 뚫을 만한 확신은 없기에, 모험보다는 순응을 택한다. 지배자들이 올라가 있는 나무 옆, 나지막한 나무 위에 머무르는 것에 만족하며 일주일에 100시간 넘게 일하고 있다. 간혹 졸다가 나무에서 떨어지기도 한다.
대다수는 오르지 못할 나무가 있다고 믿고 있다. 아니, 믿고 싶어 한다.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오르기가 겁나서이다. 한편으로는 성가시기도 하다. 하지만 두렵고 귀찮아서 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믿는 척한다. 그러다 보니 진짜로 믿게 된다. 인지부조화에 따른 자기 합리화의 좋은 사례이다.
《인생, 내 멋대로 살기 안내서》는 계몽주의적 색채를 띄는 것을 경계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무 오르기의 기쁨과 슬픔'을 알리기 위해 '보통'의 꼰대가 되어 보겠다.
나무에 오를 결심
이빨을 드러내기에 앞서, '나무는 왜 쳐다보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오르지 못할 나무 ─ 앞서 오르지 못할 나무는 없다고 했으나, 편의상 오르지 못할 것 같은 나무를 오르지 못할 나무로 표기하겠다 ─ 이든, 오를 수 있는 나무이든 나무에 오르기 전에 나무를 쳐다봐야 한다. 무작정 오르기 시작했는데, 중간쯤에서 '어! 이 나무가 아니네'라는 생각이 들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나무에 오를 결심은 그만큼 중요하다.
나무를 보며 생각해야 하는 것들은 대략 이렇다. 우선, 마음속 스카우터 ─ 만화 《드래곤볼》에서 상대방의 전투력을 측정하는 기기 ─ 로 나무의 매력도를 측정한다. 나무의 높이, 굵기, 색상, 잎의 풍성함, 열매의 유무, 전체적인 실루엣 등 평가항목은 끝이 없다. 모든 요소를 감안하다가는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버릴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 위주로 살펴본다.
일단 '매력적이다'라는 생각이 들면 '나에게 매력적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핏(fit)을 맞춰 보는 것이다. 눈을 감는다. 나무에 오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머릿속 이미지는 꽤나 구체적이어야 한다. 영사기가 돌아가듯 한컷 한컷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단계는 감성과 직감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이 나무가 내 나무다 싶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확신이 섰다면 목적도 점검한다. 사람마다 나무에 오르는 이유는 다양하다. 나무의 열매에 욕심이 있을 수도 있고 최종 목표로 하고 있는 나무에 오르기 위한 경험을 쌓고 싶을 수도 있다. 간혹, 나무에 오르는 멋진 모습 ─ 대부분 착각이지만 적어도 스스로는 멋지다고 생각한다 ─ 을 주변의 이성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 때도 있다.
나무에 왜 오르는가?
나무에 오르지 않으면, 그 시간에 무엇을 하겠는가? 잔디밭에서 뒹굴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도전이 없는 인생은 심심하다. 재미가 없다. 잘 만든 크리미 한 그릭 요거트가 얼마 안 가 시큼한 식초를 뿌린 두부처럼 변하듯 안정감은 곧 지루함으로 변질된다. 인간의 머리는 편안함을 찾지만 가슴은 그렇지 않다. 다소 위험해 보이는 도전은 가슴을 뛰게 하여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왜 오르지 못할 나무인가? (feat. 새로움)
행복은 과정에서 찾아온다. 과학적 근거와 경험적 사례는 이미 충분하다. 행복을 연구하고 있는 국내외 석학들부터 달라이 라마와 같은 고승들까지 인증하고 있으니 가히 이론(理論)이라 할만하다. 아니, 진리라고까지 할 수 있겠다.
오르지 못할 나무에 오르는 과정은 즐겁다. 오르는 내내 새로움이 주는 긴장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만만한 나무보다 꼭대기에 오를 확률이 떨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식상한 나무를 계속 오르내리느니 차라리 정상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겠다. 단, 진리를 무시할 만큼 오만하거나, 성인이 되어서도 세발자전거를 타며 즐거워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매번 똑같은 나무를 오르내려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에피쿠로스 학파라고 하면 가장 먼저 육체적이고 말초적인 쾌락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훗날 주류가 된 - 헬레니즘 시대의 라이벌 - 스토아학파에 의해 왜곡되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실제로 에피쿠로스 학파는 지속가능한 쾌락이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이끌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다. 행복에 있어서 과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지속가능성이다. 안타깝게도 롤러코스터를 처음 탈 때의 짜릿함은 인생에 단 한 번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오를 때의 쾌감도 인생에 단 한 번이다. 식상한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오를 수 없는 나무를 쳐다봐야 하는 이유이다.
과연 오르지 못할 나무가 더 위험할까?
2층 높이이든 5층 높이이든 어차피 떨어지면 다친다. 높은 나무에서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으니 더 위험하지 않은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두려운 일을 대하는 인간의 심리 - 혹은 자세 -를 감안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미지의 영역에서 우리는 신중해진다. 대비를 한다. 나무가 너무 높다 싶으면 추락방지대라도 설치하고 도전하게 된다. 모르는 산비탈보다는 아는 길에서 사고가 빈번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