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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큐 Oct 03. 2024

다작의 힘, 파블로 피카소

뉴욕의 한 갤러리에서 피카소의 작품을 본 적이 있다. 아무리 전시회에서나 볼 법한 작가의 작품들이 대형마트에 라면 놓여 있듯이 걸려있는 뉴욕이라지만, 길거리 작은 화방에서 피카소의 그림을 볼 줄은 몰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가격이었다. 우리나라 돈으로 수백만 원 정도였다. 물론 크기가 작고 채색이 안 된 스케치였다. 그래도 피카소의 작품이 이 가격이라고? 하마터면 살 뻔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렇게 선정적인 그림을 살 용기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다.



          피카소의 작품이 길거리 화방에서 거래가 되고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그의 작품이 많기 때문이다. 피카소 전기를 쓴 작가 피에르 덱스에 따르면 피카소가 사망했을 때 그의 작업실에서 나온 작품은 3만 점이 훌쩍 넘는다고 한다. 유화 1,876점, 소묘화 7,089점, - 149권의 - 노트 속 소묘화 4,659점, 조각 1,335점, 도기 작품 2,880점, 판화 프린트와 목판 18,000여 점 등 다양한 작품이 모두 완성된 채로 놓여 있었다고 한다. 판화를 제외한다고 해도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거의 하루에 하나 꼴로 작품을 완성시킨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피카소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을까? 우선 타고난 부분이 있다. 그는 남들보다 오래 살았다. 피카소는 아흔이 넘도록, 그것도 건강하게 살았다. 게다가 아버지의 영향으로 - 피카소의 아버지는 화가가 되고 싶어 했으나 재능이 부족한 탓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아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 어린 나이에 그림을 시작했다. 그의 첫 작품은 1890년에 그려진 《피카도르》 - '기마 투우사'를 뜻하는 스페인어 -인데 피카소가 겨우 아홉 살 때이다. 피카소가 사망한 해가 1973년임을 감안할 때 그는 적어도 80년 이상을 그린 것이다. 십 년 남짓한 빈센트 반 고흐의 활동기간과 비교해 보면 피카소가 얼마나 오랜 기간 그림을 그렸는지 더욱 체감이 된다. 게다가 그는 그림을 좋아했다. 피카소 본인의 말에 따르면 말도 하기 전부터 그림에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심지어 잘하기도 했다. 그는 열두 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 이것도 본인이 직접 이야기했다 -.



          하지만 아무리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라고 해도 수십 년을 지속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겹고 지치는 게 당연하다. 여기에 피카소의 위대함이 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천재성의 비밀이 숨어 있다. 그렇다면 피카소는 어떻게 오랜 기간 꾸준히 그릴 수 있었던 걸까? 내가 생각하는 비결은 세 가지이다. 그에게는 끊임없이 그릴 거리가 있었고 변화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있었으며 풍부한 소재와 계속되는 변화를 감당할 만한 작업 방식이 있었다.



          그는 경험한 것을 그렸다 - 오로지 경험한 것만 썼다는 괴테와도 통하는 바가 있다 -. 이는 그림의 소재가 끊이질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전 인정도 못 받고 가난하게 살다 간 고흐와 비교한다면 피카소는 꽃길만 걸은 것으로 보이지만 나름 인생의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는 작품을 쏟아냈다. 피카소는 스무 살이 채 안 된 나이에 친구 카사헤마스의 죽음을 경험한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버림받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친구의 모습에 피카소는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하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친구의 죽음과 관련된 그림들을 그린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경험한 슬픔은 확장되어 고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등장인물 - 창녀, 맹인, 늙은 기타수 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은 우울한 푸른빛 톤을 띤다. 표정은 어둡고 무언가 지쳐 보인다. 우리는 이 시기를 피카소의 《청색시대》라고 부른다.  



          피카소는 전쟁에서도 영감을 받는다. 그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 조국인 - 스페인에서 일어난 내전을 경험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이는 《게르니카》라는 대작으로 이어졌다. 가로 7m, 세로 3m가 넘는 이 대작은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하지만 그는 피카소 식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슬픔과 분노를 표현했다. 어찌 보면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 같기도 하다. 이 우스꽝스러운(?) 화풍이 잔혹한 현실과 맞물리며 우리는 슬픔이 가리고 있는 본질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피카소는 어린이 전시회장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아이들 정도의 나이 때는 라파엘로만큼 스케치할 수 있었어. 그러나 이 아이들처럼 스케치하는 것을 배우는 데는 내 일생이 걸렸어."  



          하지만 무엇보다 피카소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준 것은 그의 복잡한 연애사이다. 그는 에스파냐 사내답게 - 그의 표현이다 - 사랑에 열정적이었다. 그의 곁에는 항상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는 육체적인 관계를 탐닉했다 - 심지어 친구 카사헤마스의 죽음의 원인이기도 한 제르멘이라는 여자와도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 그는 실제로 여자를 가장 많이 그렸고 그의 성적인 욕망은 그를 폭발적으로 그리게 했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릴 때는 - 그의 곁에 - 페르낭드가 있었고 《게르니카》를 그릴 때는 도라 마르가 있었다. 수없이 많은 그녀들은 피카소에게 모델이 되어 주었으며 그들의 신체는 피카소의 감정에 따라 때론 아름답게, 때론 그렇지 못하게 표현되었다. 심지어 시대적, 혹은 개인적 시련이 있을 때는 여성의 신체를 왜곡해서 그리기도 하였다. 안타까운 점은 피카소와 함께 했던 여자들은 모두 그에게 버림받았다는 점이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에바와 피카소의 마지막을 지킨 자클린 로크를 제외하면 말이다. 피카소는 더 이상 영감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가차 없이 그녀들을 떠났다.



          두 번째는 변화다. 아무리 소재가 많다고 해도 비슷한 것을 그렇게 오랜 기간 하기는 어렵다. 지겹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변화의 핵심에는 모방이 있었다. 피카소가 라이벌이었던 마티스의 작업실에 놀러 갔을 때 마티스가 말했다고 한다. "저 사람은 또 아이디어를 훔치러 왔네" 실제로 피카소는 많이 베꼈다. 청색시대의 그림들을 보면 인물을 길쭉길쭉하게 그렸던 엘 그레코의 화풍이 연상된다. 유명한 그림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드가와 툴루즈 로트레크의 영향을 받았다. 드가에게서는 여성의 몸단장과 다양한 자세를, 로트레크에게서는 사회에서 거부당한 이들 - 매춘여성들 -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각을 배웠다. 《어릿광대》의 젊은 곡예사가 입고 있는 짧은 상의는 마네가 그린 《늙은 음악가》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고갱, 세잔, 벨라스케스 등 다양한 거장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앵그르의 《터키탕》은 그림의 주제, 구도, 인물의 자세 등 피카소의 그림 인생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카소가 단순히 베끼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는 단순히 모작 화가에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피카소는 자신과 모방의 대상이 된 거장들을 동급으로 보았다. 심지어 명성을 얻기 전에도 그랬다. 피카소에게 그들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넘어서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다빈치, 뉴턴, 아인슈타인 등 다른 천재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피카소는 마음속으로 그들과 대결 구도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수없이 따라 연습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모방의 대상이 늘어나면서 거장들이 피카소 안에서 연결되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피카소만의 화풍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피카소는 현대미술의 문을 연 거장이 될 수 있었다.  



          피카소는 그만의 작업방식 덕에 풍부한 소재를 소화하고 끊임없는 변화를 감당할 수 있었다. 그는 빨리 그렸다. 심지어 일주일에 열 개가 넘는 작품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피카소의 천재적인 능력과 대충 그린 것 같은 화풍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밖에도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바로 연작이다. 그는 같은 주제를 여러 번 그리곤 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생각을 정리했고 그림은 그가 원하는 곳으로 향해 갔다. 빈센트 반 고흐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습작도 많다. 그는 중요한 그림을 그리기 전 수없이 많은 준비 그림을 그렸다. 전체적인 구도에서부터 인물의 자세, 표정까지 하나하나 연습해 보고 난 후에야 본 그림에 착수하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습작조차 하나의 훌륭한 그림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피카소는 요샛말로 프로세스 이코노미를 잘 활용한 화가일지도 모른다.   



          창의력이 '질' 보다 '양'에서 나온다는 근거는 이미 충분하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부터 천재들의 삶을 심도 있게 들여다본 연구까지 대부분의 결과는 질 보다는 양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연'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우연의 사전적 정의는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이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인과 관계가 없다기보다는 모르는 것이다. 대부분의 창의적인 혁신은 우연히 일어난다. 즉, 우리의 이성과 논리로는 창의적인 결과물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성공을 설명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성공을 하기 위해 많이 해야 한다. 주사위를 6번 던지면 원하는 숫자가 한 번도 안 나올 수 있지만 600번 던지면 대략 100번은 나온다. 이것이 평균회귀이다. 인간이 운을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피카소는 운을 다스릴 줄 아는 자였다. 그는 평생 동안 3만 번이 넘는 주사위를 던진 것이다. 그가 성공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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