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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킴 Mar 18. 2024

엄마의 마음, 아내의 마음

지난밤 남편이 뜨거운 물에 데었다. 자정이 될 무렵 남편은 여느 때처럼 추위를 많이 타는 나를 위해 물주머니를 만들고 있던 차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팔팔 끓은 물을 물주머니에 채워 내가 눕는 자리의 발치에 두는 것은 그의 오래된 루틴이었다. 하필 우리는 이날 마침 신도림에서 열린 성 패트릭 데이(St.Patrick’s Day) 행사에 놀러갔다 기네스를 연거푸 들이켜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고, 별생각 없이 잠자리 루틴에 들다 사고가 난 것이었다. 


나는 부엌에서 들리는 단말마와 같은 비명에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뛰어가 보니 싱크대에 내동댕이친 물주머니 위로 물이 사방에 튀고 남편의 왼쪽 손등과 배 부분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차가운 물과 얼음팩을 동원해 화기를 가라앉히려 했지만 붉은기는 점점 심해졌다. 심지어 배 한 쪽은 살갗이 살짝 벗겨지까지 한 모습이었다. 약국에서 파는 화상연고를 발라도 별 소용이 없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은 고통을 호소했다. 1시간이 지나서야 결국 우리는 동네 2차 병원의 응급실을 향했다. 


집 근처에 문을 연 응급실은 한 군데뿐이었다. 문 앞에는 어깨에 새긴 ‘security’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무기력한 얼굴을 한 보안요원(?)이 철제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대기실에는 보호자인 듯한 두 명의 중년 남녀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역시나 무기력한 얼굴의 직원이 접수를 받으며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 


상태가 심각하면 여기서 치료 못 받을 수도 있어요


나는 저게 대체 무슨 말인지, 그렇다면 어딜 가라는 건지 하는 의문을 머릿속으로만 던지며 초조한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렸다.


영국인인 남편은 병원에 갈 때마다 내가 필요했다. 필요했다기보다 나의 동행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남편은 기본적인 한국어를 구사하지만 병원에 오면 유독 쩔쩔 맸다. 종종 영어가 유창한 의사를 만나기도 하는데 심지어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기본적으로 남편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다. 사실 이와 같은 불안은 꼭 병원뿐만 아니라 근로계약서를 쓰는 것과 같은 중요한 순간, 혹은 통신사 매장에 가서 휴대폰을 바꾼다거나 하는 가벼운 일상에도 적용됐다. 많은 상황에서 나는 말 그대로 그의 ‘보호자’였고 그러다 보니 남편은 종종 내 아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남편이 조금만 다쳐도 나는 불필요하게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가까스로 만난 의사에게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화상 치료를 해주겠다고 했다. 야간 응급실 업무가 지치기도 하겠지만은 나는 그 경직된 분위기 때문인지 마치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배 한가운데 커다란 밴드를 붙이고 거친 붕대로 왼손을 꽁꽁 묶인 남편은 통증주사를 맞고 나서야 조금 나아진 것 같다고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일상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피부색이 변할 수도 있다는 말이 자꾸만 마음을 때렸다. 왠지 모르게 자꾸 엄마 생각이 났다. 


아이 같은 남편이 다쳐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자식이 아프면 그 마음은 어떨까. 지금도 이렇게 속이 상하는데 내 아이가 다쳤을 때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을까.


내가 두 살 무렵, 나는 불운의 사고로 큰 화상을 입었다. 단순히 뜨거운 물이 닿은 정도의 사고가 아니었던 터라 내 허벅지 한쪽은 피부가 크게 뒤틀려 버렸다. 너무 어릴 때 일이라 그 고통이 기억도 나지 않지만 성장하면서 내 상처를 본 철없는 아이들이 징그럽다며 소리를 지른다거나 하는 경험을 하나둘 하게 되면서 내 다리에 새겨진 지도가 상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같다. 종종 남들의 시선에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으나 짧은 옷을 입지 않으면 그만, 남들이 보지 않으면 전혀 불편할 일도 없었다. 부모를 원망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 다리를 볼 때면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침대에 누워 화기로 달아오른 남편의 등을 어루만지다 다친 남편이 가엾기도 하고, 오래 전 엄마가 겪었을 고통이 가늠조차 되지 않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두 살배기가 3도 화상을 입고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래도 엄마는 나보다 강해서, 엄마는 아내보다 강해서 그 고통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올곧이 살아냈던 거겠지. 상처 위로 새살이 돋듯 엄마의 마음으로 나 역시 단단하게 살아나가야 할 것이다.


남편의 열기 때문인지 내 눈물 때문인지 발치에 뜨거운 물주머니가 없음에도 이불 속에 온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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