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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 Jun 01. 2021

Like-minded를 넘어선 연대는 가능할까?

◆ Like-minded: 생각(뜻)이 비슷한. 이 글에서는 비슷한 지향점, 가치관, 태도 등을 가진 사람들을 뜻한다. 


  양극단의 갈등이 첨예한 시대. 대립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언론과 SNS를 잠식한다. 방역과 생계, 다수의 안전과 개인정보, 국뽕과 비판, 젠더 갈등이 날 선 대립각을 세우며 온 매체를 뒤덮었다. 그 치열함이 피곤해 듣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 날이 더 많아진다.  

피곤하다 피곤해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일상에서 그와 같은 첨예한 대립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대립보다는 오히려 비슷한 관점과 지향을 가진 이들이 더 많다고 하는 게 맞다. 물론 나의 주변 반경을 조금 더 넓게 잡는다면 정반대의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성향을 드러낼만한 대화나 상황을 딱히 만들지 않기 때문에 첨예한 대립이 일어날 일이 거의 없다. 피상적 관계에서 나누는 대화에 격렬한 입장차가 발생하기는 쉽지 않으니까. 


   내가 직접 만나 대화 나누는 사람들 대부분은 척하고 말하면 딱 하고 알아듣는 사람들이다. 비슷한 맥락과 지향점을 가졌기 때문에 평온한 대화를 이어가기 좋다. 시끄러운 세상, 내 편과의 대화가 주는 안도감과 편안함은 벗어나기 힘든 겨울 아침 이불속처럼 나를 단단하게 이끈다. 그러니 내 주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은 점점 더 두껍게 채워지고 반대 성향의 사람들은 나의 자기장 밖에 존재하게 된다.  


젊은 혁명가와 젊은 의사들, 계획가들의 태도는 참으로 반동적인 하나의 힘에 의해 한데 묶인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겪는 경험은 순수화 과정에 종속된다. 뚜렷하고 명료한 자아상과 세계 속 자신의 자리를 고스란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위협이나 고통스러운 불화를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불화보다 이미 아는 것들과의 조화가 더 현실적이라고 해석함으로써 경험은 순수화된다. 

ㅡ 리처드 세넷, <무질서의 효용>, p.38, 다시봄  


  그러던 어느 날, 리처드 세넷의 <무질서의 효용>을 읽었다. ‘개인의 정체성과 도시 생활’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순수한 정체성의 추구가 도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설명한다. 세넷은 현대 도시는 부모의 컨트롤에 따라 청소년 시기부터 순수한 정체성을 추구하게 되며, 이를 바탕으로 공동체 형성뿐 아니라 도시 계획이 설계된다고 말한다. 도시는 거시적 규모로 계획되는데, 이 계획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충돌과 갈등에 대해 도시계획가는 예측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순수를 추구하며 계획되고 만들어진 도시에 충돌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런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청소년기부터 일관성을 추구하도록 길러지는 것이다. 순수함을 좇는 사람들의 강한 신념은 강화된 가족주의, 풍요로움을 딛고 다른 이들과의 접촉점을 점점 더 제거해 나간다. 


세넷이 말한 도시의 순수한 정체성을 가지고 내 주변을 들여다보았다. 비슷한 사람들로 단단하게 다져진 나의 주변이 세넷이 말하는 순수한 정체성 그 자체였다. 비슷한 나이, 비슷한 교육 수준, 비슷한 라이프스타일, 비슷한 관심사와 지향점을 가진 사람들로 좁고 단단하게 구성된 나의 주변. 나는 그 안에서 첨예한 대립이 없다고 좋아하며, 갈등 없는 고요를 즐겼다. 하지만 그 안에서 다름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나의 근육이 점점 약해져 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우물 밖 세상의 다름에 대해 나는 진실된 포용력과 이해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연대하기 싫은 사람 

  연대는 다른 입장과 경험, 맥락에 선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는 어떤 한 지점으로 나아가기 위해 마음과 힘을 모으는 일이다. 하지만 그 연대의 과정 안에 전부 ‘나 같은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다. 순수성을 추구하며 단단하게 꾸려진 내 주변 밖,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과 연대하기도 한다. 그들은 척하면 딱 하고 알아듣는 사람들이 아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부터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법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를 수 있다. 


말도 섞기 싫을 만큼 나와 판이하게 다른 사람과 내가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나는 그의 맥락과 입장에 대해 얼마나 귀 기울이고, 이해하려 노력할 수 있을까? 끝이 없는 평행선 같은 대화에서 합의점을 찾기 위해 나는 얼마큼 애를 쓸 수 있을까? 이런 사람과 연대할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어렵고 버겁다. 많은 경우 이런 어려움을 예상하고 연대를 시작조차 하지 않고, 차라리 혼자 가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 연대를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고민한다. 나와 같지 않은 사람과 연대하는 방법을 말이다.  

  가까운 방법으로는 약속문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공론장이나 연대체, 네트워크 단위에서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확인하는 약속문을 정하기도 한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평등하고 즐거운 연대를 위한 약속" 

평등한 지역운동을 만들기 위한 경기수원지역 활동가 네트워크 

출처 /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출처 / 다산인권센터 

  하지만 약속문은 서로 다른 이들이 공동의 수칙을 정하고 지향점을 확인한다는 차원에서 연대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공동의 약속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드는 ‘저 사람이 진짜 싫어!’를 극복하고 연대를 시작하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부터 필요하다. 가시밭길이 예상되더라도 같이 가야 할 필요가 있다면, 겁내지 않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하지만 손을 내민 게 다는 아니다.  연대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고난과 갈등을 슬기롭게 받아들이며, 주저앉지 않아야 한다. 연대하기 싫은 사람도 포용하고 함께 걸어가는,  상상만으로도 이상적인 이 연대의 모습이 과연 현실에 존재할까? (그 해답을 세속에서 찾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제 더 이상 혼자의 힘으로 풀 수가 없다 

  사회 문제는 날이 갈수록 복잡하게 꼬여간다. 문제가 단순했다면 지혜로운 누군가의 경험과 해답만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지금 시대의 사회 문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수많은 지식과 정보, 경험이 필요하며 이는 한 사람에게 의존해서 될 수준이 아니다. 그러니 모두의 힘과 지혜를 모으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그 과정이 쉽지 않으며, 더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더 많은 머리와 힘을 모으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판데믹이 터지면서 이 사실을 더 절실히 깨닫지 않았는가.


  코로나 19뿐 아니다. 가깝게는 나의 이웃의 문제부터 기후위기, 인종갈등, 젠더갈등 모두 한 사람의 뛰어난 지식과 경험만으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 더 이상 혼자의 힘으로는 풀 수 없는 사회 문제를 감당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지식과 경험, 정보를 나누고 연대해야 한다. 설령 그 연대를 맺어야 하는 사람이 너무 싫은 상대라 할지라도. 연대를 기반으로 한 이해와 소통 없이는 우리가 처한 문제를 진단할 수도, 해결책을 찾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과학 논문에서는 항상 저자를 ‘우리 We’라고 칭한다. 물론 과학 논문은 대부분 여러 공동연구자가 함께 내용을 채워 넣기 때문에, 우리라고 쓰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학위논문이다.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의 저자는 당사자 한 명인데, 그래도 논문을 쓰는 저자를 자칭할 때 ‘우리’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학위논문을 쓸 무렵에는 교수님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고 선배들도 그렇게 했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따라 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학위를 받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연구는 내가 인류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 속의 ‘우리’는 논문의 공저자들이 아니라 인류다. 달에 사람을 보낸 것도 미 항공우주국의 연구원이나 미국의 납세자가 아니라, ‘우리’ 인류인 것이다. 그토록 공들여 얻은 우주 탐사 자료를 전 인류와 나누는 아름다운 전통을 그래서 당연하다.  

ㅡ 심채경. 우리, 태양계 사람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p.265. 문학동네 


  이전 글에서 ‘왜 우리는 여전히 문제 해결 방법으로 연대와 협력을 꼽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번 글을 마무리하며 어느 정도 답의 가닥은 찾은 듯 보인다. 복잡한 문제들을 누구 하나의 정답으로는 풀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연결과 연대, 협력을 찾고 있다고. 완벽한 정답은 아니지만 연대와 협력을 지금 이 시점에 말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복잡해진 사회문제 탓에 연대의 필요성이 높아졌다고  연대가 더 쉬워졌거나, 하고 싶은 것이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연대하기 싫은 사람의 존재와 그와의 연대 과정에서 마주할 갈등이 두려워 주저하게 된다.


다시 이 글의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 Like-minded를 넘어서 연대할 수 있을까? 

나 스스로에게 한정되어 이 질문을 던진다면, 지금 시점에서 답은 ‘불가능하다’이다. 나의 깜냥을 생각하면 솔직한 답변이다. 특히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like-minded를 깨고 다름을 찾아 나설 만큼의 사회성을 회복하지 못했다. 익숙한 것에 자꾸 빠져들고, 낯선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다. 복잡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공식을 알면서도, 개인이 실천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 이제 어째야 할까? 나는 앞으로 연대와 협력의 기능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게 되는 건가?


Like-minded 안에서 연대의 경험치 +1

  우선은 익숙하고 편안한 곳에서 좀 더 몸을 풀어볼 생각이다. 준비 없이 물에 풍덩 뛰어드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으니.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Like-minded 한 테두리 안에서도 다름과 낯섬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모두 똑같다는 순수의 환상에서 벗어나 각자의 맥락과 다름에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특히 나에게는 더욱더!  넓은 아량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름에 대한 인정과 이해를 키우는 것, 그게 갖춰지고 나서야 like-minded를 넘어선 연대를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을 버리고 안전한 이 곳에서 좀 더 몸을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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