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가면을 쓸 일이 부쩍 많아졌어요. 어른이 되면서부터요. 슬퍼도 아무 곳에서나 울면 안 되고 싫은 사람 앞에서도 웃을 줄 알아야 해요. 간신히 화를 참느라 머리가 지끈 아픈 날도 있어요. 애써 감정을 숨겨야 하는 상황도, 솔직하지 못한 표정도 조금 지치네요.
이럴 때면 여행이 생각납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동해 바다, 이곳은 저를 자유롭게 할까요?
동해 어달항: 바다의 설렘
여행의 첫 장소는 어달항이라는 아주 작은 항구예요. 동해에서 유명하다는 탕수육 맛집을 찾아가다가 우연히 발견했지요. 몇 걸음 되지 않을 짧은 방파제 길 끝에 자리한 등대로 향합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작은 해변과 항구는 유난히 한적하고 조용합니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 사이로 간간이 까르르 웃으며 뛰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요. 방파제 가까이 자리를 잡은 낚시꾼들이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에 서니 햇빛에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배시시 미소 짓게 돼요. 바다 앞에서는 별 거 아닌 것도 낭만과 설렘이 되지요. 투명하게 맑은 에메랄드빛 바다의 잔잔한 움직임이 우아하네요.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햇살의 반짝임에 시선과 마음을 빼앗겨요. 마치 값비싼 보석을 가진 듯 스스로 빛나는 존재인 기분이 들어요. 복잡한 고민은 잠시 잊고 그저 설레는 마음으로 바다를 즐깁니다.
도째비골 스카이밸리: 새로운 경험에 대한 두려움과 용기
가족여행이란 바다를 보며 한가하게 공상에 빠질 여유를 주지 않는 법이지요. 동해의 트레이드마크인 스카이밸리로 이동합니다. 높이 59m를 자랑하며 드넓은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대이자 각종 레저시설이 있어요. 그곳에서 아빠가 다음에 꼭 같이 타자고 말하시던 하늘 자전거에 도전해요.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 타게 된 하늘 자전거는 이름 그대로 영화 ET처럼 허공에서 타는 자전거였어요. 아래에서 볼 땐 짧고 시시해 보였는데 위에서 보니 하나의 줄에만 의지한 채 생각보다 긴 거리를 오갑니다. 순서가 다가올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에 땀이 나요.
일반 자전거와 똑같이 직접 페달을 구르지 않으면 앞으로 가지 않아요. 이성적인 머리와 달리 왜인지 떨어질 것 같은 마음에 발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네요.천천히 페달을 구르기 시작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두리번거리며 사진 찍는 엄마와 친오빠를 찾아봅니다. 잠시 중심을 잃은 듯 휘청이는 느낌이 들었으나 침착하게 다리를 움직여요. 반대편에 도착하자 진행요원이 다정한 말투로 물어보네요.
"무서웠어요?"
"아니요. 재미있었어요."
그래도 한 번 해봤다고 자신감이 붙고 자전거를 즐길 여유가 생겼어요. 돌아갈 땐 정면을 보며 최대한 방긋 웃기도 해요. 도착한 후, 자전가에서 내리자 다음 차례는 노부부입니다. 순수하게 들뜬 표정으로 줄을 선 할아버지와 약간은 무서워하던 할머니의 모습에서 여행의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요. 여행은 새롭고 낯선 경험 속에서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동시에 그걸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함께 줘요. 그리고 용기 낸 순간은 나이와 상관없이 신선한 자극이 될 거예요. 일상으로 돌아가도 마음 한편에 영원히 남을 만큼이요.
캠핑: 휴식의 편안함
이번 여행의 숙소는 바다가 보이는 캠핑장이었어요. 오랜만의 캠핑을 위해 아빠는 과거에 하나씩 모아둔 장비를 꺼냈지요. 27살의 오빠가 초등학생 때부터 사용하던 오래된 텐트는 알록달록한 원색 계열로 이루어져 있어요.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처럼 레트로 감성을 뽐내네요. 캠핑 의자도 서로 짝이 안 맞고 침낭도 세련된 느낌은 아니지만, 모든 게 어제 쓰던 물건처럼 익숙해요.
어느새 해는 지고 텐트에 걸어둔 조명이 주변을 노랗게 비춰요. 어느새 훌쩍 자라 성인이 된 아들, 딸은 부모님과 함께 와인잔을 기울입니다. 오늘의 요리사는 친오빠예요. 새우가 듬뿍 들어간 감바스 알 하이오로 시작해서 그리드에 굽는 삼겹살, 소시지까지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캠핑의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네요.
시간이 느리게 흘러요. 타닥거리는 모닥불 소리와 달리 장작 속에서 불꽃이 느리게 일렁이는 것처럼요. 쫓기듯 무언가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오늘은 무슨 일이 생길까 긴장할 필요도 없어요. 가만히 앉아서 가족들과 별 거 아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몸과 마음이 모두 편안한 상태예요. 따뜻한 온기를 느끼는 동안 별이 가득한 밤이 지나갑니다.
망상 해수욕장: 부모님의 사랑을 향한 감사
다음 날 목적지는 망상 해수욕장이었어요. 해는 쨍쨍한데 뭉게뭉게 뜬 먹구름이 해변을 채워요. 이질적인 하늘이 짙은 바다의 수평선과 맞닿아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요. 모래 사이로 파고드는 발의 무게를 느끼며 바다 가까이 걸어갑니다. 뒷짐을 진 채 바다를 보는 아빠 곁에 다가가 나란히 서요. 파도가 발 끝에 닿을 듯 밀려왔다가 멀어지네요.
예전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어요. 나이가 7살쯤 일 때 가족들과 망상해수욕장의 오토캠핑장을 다녀갔었어요. 온몸에 모래를 묻히며 친오빠와 모래사장을 파헤쳤고 캠핑장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기도 했지요. 안타깝게도 그때 묵었던 오토캠핑장은 화재로 소실되어 과거의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캠핑카에서 처음 잔다고 무척 신나 했던 기억이 남아있어요.
예전에 다녀왔던 여행지에 다시 갈 땐 부모님께 늘 감사해요. 여행을 좋아하시는 아빠의 영향으로 태어난 지 6개월부터 매주 산과 들, 바다를 가리지 않고 가족여행을 떠났어요. 덕분에 사랑을 듬뿍 받으며 새로운 경험을 하고 다채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었네요. 어른이 된 지금, 힘든 순간이 찾아와도 가족과 함께 추억의 여행지로 간다면 언제나 아이처럼 웃을 수 있을 거라 믿어요.
Q. 여행은 당신을 자유롭게 하나요?
여행에서는 순간마다 느끼는 감정을 꾸밈없이 표현할 수 있어요.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장소에서 남의 시선을 덜 신경 쓰고 상황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자연스럽게 기쁨을 격한 감탄사로 외치고 아쉬운 것에 속상한 표정을 짓게 되지요. 감정의 가면을 쓰지 않은 가장 솔직한 모습일 거예요. 당신에겐 솔직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한가요? 여행을 통해 스스로에게 마음껏 웃고 울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해 주세요.
작가의 말
세상이 정한 답을 따라가기보다 질문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제이드인엑스입니다. 이번 글은 2020년 2월에 다녀온 아빠와의 네팔 여행기 이후 거의 1년 반 만에 쓴 여행기예요.
사실 올해 새로운 국내 여행기 시리즈를 준비하려 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감사하게도 여행을 좋아하시는 부모님을 따라 우리나라의 다양한 지역을 여행할 수 있었고 그 여정이 많은 사진과 영상을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과거의 여행지를 다시 여행하며 '부모님이 가르쳐 주신 여행의 의미'를 질문하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여행을 마음껏 떠날 상황이 아니기에 선뜻 시도하지 못했네요. 이대로 한 해를 마무리하긴 아쉬워서 위드 코로나 시기인 11월 초에 다녀왔던 여행을 파일럿 프로그램처럼 작성했습니다.
내년 상반기부터는 시기가 좋아질 때마다 여행을 떠나 기록을 남겨 보려고 합니다. 제가 적을 여행의 의미와 질문들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