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나는 할아버지 고양이는 추정 나이 13살, 코리안숏헤어 수컷 고양이다. 사람 나이로 환산하면 무려 112살이니 공경해야 할 어르신이다.
[네이버] 고양이 나이 계산기
할아버지 고양이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노랑이, 누렁이, 치즈, 야옹이.’. 이쯤 되면 노란 털옷을 입은 고양이라는 걸 눈치채야 한다. 동네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 나는 보통 ‘호칭’으로 부르는데, ‘슨상님~ 아저씨~’로 부르다 3 년 전부터 '삼춘'으로 부르고 있다. 제주에서는 남녀 구분없이 웃어른을 삼춘으로 부른다. 정겹게 느껴지는 호칭은 할아버지 고양이에게 찰떡이었다.
삼춘의 청춘은 알지 못한다. 중년 이후부터 만난 삼춘은 ‘부서지고 때 묻은 발톱’을 떨구고 다니는 할아버지 고양이가 되었다.
2022년 겨울, 추위를 피했던 겨울집
사람에게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먼저 다가가는 다정한 고양이지만, 고양이에게는 그렇지 않다. 젊었을 때는 나름 힘 좀 쓰는 듯 보였고 나이가 들면서 순리대로 살아가는 평화주의냥이 되고 있다. 가끔 얼굴에 상처를 입고 나타나는 날도 있는데 '이것도 순리일 테지' 한다. 어쩌면 사람에게 다정한 것도 할아버지 고양이로 늙어가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일 수도 있겠다.
퇴근하는 동네 누나한테 사랑받는 중
고양이에게는 무뚝뚝한 편인데도 늘 곁에는 따라다니는 고양이들이 있다. 앞에서 길을 막고 걷거나 성가시게 굴면 어김없이 냥냥펀치를 날리는데 한 번 친구가 되면 코인사도 하고 그루밍도 해주는 츤데레 할아버지다.
1대 삼총사_삼춘, 여름이, 고슨상님
오랜 기간 머물던 영역에서는 새로 개업한 반찬 가게 아저씨가 물을 뿌려서 쫓았고, 삼춘에게 큰 기둥이었던 고양이 하숙집 할아버지가 이사를 가면서 ‘고양이 밥 주지 마라’고 언성을 높이는 아저씨를 피해 골목을 떠나야 했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피해 영역 이동을 하며 고군분투하는 시간을 보낸 삼춘이지만, 여전히 사람을 좋아한다.
동네에는 할아버지 고양이에게 다정한 친구들이 있다. 아침 7시에는 보행기 잡고 산책하는 할머니에게 ‘이쁘다’ 칭찬을 듣고, 오후에는 초등학생 지우와 놀이터에서 놀았다. 딱총으로 괴롭히는 친구들로부터 구해주겠다고 약속도 받았다. 고양이 투숙객을 받아주는 고양이 하숙집 할아버지는 추운 겨울에 따뜻한 방에서 재워 주고, 새로 사귄 2층 집 할머니는 갈치를 사다가 구워 주었다. 하늘과 가까운 3층 집에 사는 할머니는 쉬다 가라고 담요를 깔아 주고 안전하게 머물 공간도 허락해 주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밥 차려주는 누나는 의식주를 책임져 준다.
동네 할머니가 잠시 쉬어가도록 현관문을 열어줬다옹.
구내염을 앓아서 약을 먹이고 가끔 싸워서 얻은 상처는 연고를 발라준다. 나이 든 고양이라 하루라도 안 보이면 걱정되고 불안한 생각을 하게 되지만, 길에서 13년을 살아온 지혜로운 삼춘을 믿어보기로 했다.
얼마 전부터는 외부 공간이지만 온실 안에서 지내며 할아버지, 할머니, 누나 집사 세 명의 룸서비스를 받고 있다. 고등어 태비 고양이 여름이와 고등어 카오스 고양이 아가씨와 온실을 셰어 한다. 둘 다 암컷 고양이인데 여동생보다는 손녀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삼춘이 골목 마실을 나가면 쪼르르 따라나서는데, 공주님들은 천진난만 신나는 발걸음이고 삼춘은 뒷짐 지고 걷는 우리네 할아버지처럼 느릿느릿 걷는다.
2024년 현재, 다가구 주택 마당 한켠을 사용하도록 허락받아 만든 겨울 아지트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들의 바지는 털바지로 리폼해 주고 신발은 침을 발라 ‘내 친구’라고 체취를 남기는 할아버지 고양이는 사람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누구보다 잘 아는 고양이다.
처음 만나는 중학생 친구에게 반갑게 인사나누는 삼춘
동네에서 13년을 살아온 삼춘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팬 중 한 명으로 길 위에서 동화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삼춘의 묘생을 기록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