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의 크랙과 삶을 견주다
고려 청자와 조선의 백자는 세계적인 수준의 도자기다. 좋은 흙을 골라 빚어 만든 그릇에 유약을 바르고 가마에 넣어 열을 가한 후에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렇게 꼼꼼하게 만든 도자기의 표면에는 열이 식으면서 크랙(crack)이 생긴다. 이 크랙을 유빙렬(釉氷裂)이라고 한다. 고온에 있던 도기가 열이 떨어지면서 금이 생길 때 들리는 빙렬이 생기는 소리를 누군가는 ‘요정들의 음악회’ 라고 했단다.
커피 로스팅을 할 때 생기는 크랙도 고온 때문에 생긴다.
옛날에는 중국이나 한국이나 유빙렬이 없이 도자기를 구워 표면이 깔끔한 것을 최고의 상품으로 쳤다. 하지만 결점이 없는 도자기를 만드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만들기도 힘들었거니와 만들었다 쳐도 그에 들인 에너지가 너무 크면 오히려 상품의 가성비가 떨어져서 전시만 할 수 있고 도자기 본연의 기능인 술이나 음식을 보관 하는 일은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유빙렬이 도자기 표면 디자인이 되었다. 유빙렬이 일정하게 생기면 일종의 패턴이 되는 것이었다.
유빙렬이 있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한치의 결점도 없는 도자기가 더 가치가 있을까? 확실한 것은 유빙렬이 있는 도자기라 해도 한국의 백자와 청자는 최고의 명품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빙렬이 없는 도자기가 찾기 힘들듯이 세상에 태어나서 노동 없이 살 수 있는 금수저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는 모두 노동을 해야 하고 그럴 권리도 있다. 일본 작가인 야마모토 슈고로는 '노동이 뒷받침되지 않은 부는 인간을 그르친다.'고 했다. 누군가는 노동을 예찬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노동자란 말 대신 노예라며 자유로운 삶을 권유한다.
누가 맞을까. 공장에서 단순한 일을 반복하든, 사무실에서 뻔한 업무를 계속하든, 일에 지쳐서 성취감을 느낄 겨를이 없는 현대인들에게는 '일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은 삶을 질식시킨다.'라고 했던 알베르 카뮈의 말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노동은 하되 생각을 하면서 하라는 것, 일은 하되 그 이면을 보고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평화롭고 무난한 인생을 산 사람도 험난하고 기구한 삶을 산 사람도 누구든 살아온 가치를 인정 받는다. 아니 그래야 한다. 유빙렬, 도자기의 가치는 이것이 있든 없든 인정 되는 것이고, 우리 모두는 소중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