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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하 Aug 17. 2021

패배를 무릅쓰고 쓰는 당신에게

이슬아X남궁인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안녕하세요.

저번 글에서 저는 이제껏 써온 방식을 새로이 바꾸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누구든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수신자 삼아 편지를 쓰겠다고 말이죠. 이것이   번째라고   있겠습니다만, 막상 호기롭게 쓰겠다고 말하고 돌아서니 생각이 많아지더군요. 글을 읽는 모두를 수신자로 삼는다는   수신자가 공석이라는 뜻인데, 구체적 수신자가 없는 편지는 발신자의 과잉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누군가 읽을 것을 염두에  일기 쓰는 짓 하려는 건데 이는 자의식 과잉의 문장을 낳기  좋은 조건이 아닌가? 하고 말이죠. 때마침 보고 있던 SNS에선 누군가 ‘ 쓰지 마세요라는 게시물을 올렸습니. 자기 과잉의 흑역사를  곳에 흩뿌리고 싶지 않다면 함부로 펜을 잡지 말라는 요지였지요. 정말이지, 등골이 오싹하더군요. 나도 모르는 나의 흑역사가 주위를 에워싸고 에베베- 놀리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글이란 본래 자기변호와 닮아있음을 알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공간에 나를 내보이는 일이 그토록 공포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읽어주지도 않는 채널에서 이런 걱정을 하는 것부터 저의 자아는 글러먹었는지도 모르죠.(물론 글이란   명이라도 진심으로 읽어준다면 유의미한 것이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여기까지 읽어준 당신... 행운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자아 과잉 위험을 해결하지 않고선 글을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어요.

사실 저는 글뿐 아니라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저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대화를 하든 SNS 게시물을 올리든 마찬가지죠. 어떻게든 저를     꽁꽁 감싸고서야 안심하고 세상에 내보내는 식입니다. 지명수배자도 아니고 숨겨진 왕족의 자손도 아닌데 말이죠.  과한 자기 보호 혹은, 타인으로부터의 자기 ‘방치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헤아려보았습니다. 거기에는 각종 두려움이 있었어요. 실수하는 것의 두려움, 비난받는 것의 두려움, 가장 근저에는 외롭게 홀로 남아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말이죠.

나를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행위는 꽤 위험합니다. 세이 호-! 하고 마이크를 넘겼는데 아무도 호-! 하고 답해주지 않는 숨 막히는 고요를 예감하는 일이죠. 고요 정도는 양반이고, 야유가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어리석고 이기적인 동시에 이 모든 결함을 변명하려는 욕망에 가득 찬 평균적인 인간이니까요. 내 글이 이런 나의 약점을 보여주는 전시장이 될까 봐, 그 전시장에 홀로 서서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초라한 주인장이 될까 봐, 저는 그것이 무서웠습니다.

그렇다면, 쓰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무섭다면 말이죠. 그런데 저는 왜 쓰고 앉아있을까요? 이 글도 얼마든지 무시받을 수 있지만 저는 쓰고 있습니다. 뭘까요? 쓰지 않도록 만드는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고 기어이 쓰게 되는 동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이쯤에서 ‘안 궁금해요.’라고 생각할 당신을 붙잡고, 글의 효용을 높이고자 책 한 권을 소개하려 합니다. 에세이스트 이슬아 님과 의사 겸 작가인 남궁인 씨가 주고받은 편지를 담은 책인데요, 제목이 무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입니다. ‘무려’라고 표현한 데는 이유가 있어요. 보통 편지라 함은 애정과 호의를 바탕으로 상대를 조금은 치켜세워주고 ‘우리 사이 포에버’를 외치기 마련이잖아요. 하지만 이 책은 제목처럼 ‘넌 나를 오해하고 있어’에서 시작합니다. 이슬아 작가님은 첫 편지부터 ‘저는 선생님이 쓰는 사랑 편지가 느끼합니다!’라는 ‘선빵’을 날리죠. 그 후로도 서로를 향한 지적과 반박, 변명과 자기 변호가 가감 없이 오고 갑니다. 그걸 읽다 보면 아슬아슬한 기분이 들어요. 적당한 친절과 아름다운 문장으로 안전하게 포장된 글이 아닌, 실수와 오류, 오해로 시원하게 벗겨진 글이니까요.

하지만 이슬아 작가님이 ‘절교 위험에도 불구하고 선빵을 날린 데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펀치를 날리지 않으면 ‘거짓으로 아름다운 편지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죠. 그러니까, 편지를 받을 당신에게 ‘가짜인 나 내보이고 싶지 않다는 비장함이 서려있는 펀치입니다.  사람의 편지가 친절과 호의로만 이루어져 있었다면 두려움과 쪽팔림이라는 감정은 거기에 없었을 겁니다. 언뜻 보기에 아름답고 견고한 관계 같죠. 하지만 씨앗을 빼낸 참외처럼 속이 비어있을 테니  우정이 오래가진 못했을 겁니다. 글은 귀신 같이 알거든요. 자신을 이루고 있는  진심인지 아닌 , 읽는 이의 마음에 닿을  있는 것인지 아닌 지를요.

쪽팔림과 두려움을 무릅써야만 닿을 수 있는 진심이라는 게, 글에는 있는가 봅니다. 이불을 발로 펑펑 차며 괴로워하는 밤을 보내고 패배로 회귀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단단해지는 관계라는 게 우리 삶에 존재하는 지도요.

왜 나는 초라함을 견디고서 굳이 쓰는 걸까. 그건 제가 ‘편지’라는 형식을 택한 이유와 맞물리는지도 모르겠어요. 실수할 두려움, 비난받을 두려움, 혼자가 될 두려움을 안고서 실패를 반복해서 쓰다 보면 언젠가는 이해받을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어떤 필터도 씌우지 않은 저를 보고서 ‘나 그거 뭔지 알아’라고 답해주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미약하지만 없다고 말할 순 없는 그 가능성이 저를 쓰게 만드나 봅니다.

 작가님이 글로 날리는 ‘(jap)’ 보면서   가지 배운 것이 있습니다. 글로 나를 내보이는  중요하지만, 글이 내보일  자의식 과잉의 일기가 되기 쉽다는 겁니다. 오해의 반복 끝에  책은 ‘오해는 흔하고 이해는 희귀하니, 오해에서 이해로 가려하는 지금 우리의 우정은 이제  시작되었다 말하거든요. 나를  힘껏 보여주려는 시도는 상대를 제대로 알려는 노력과 함께 가야 한다는 거겠죠.  글이 자기 과잉의 (show) 되지 않으려면  번이고 다짐해야  배움이겠습니다.

그런 고로 묻습니다. 당신은 쓰고 계신가요? 문득 초라해질 위험을 감수하고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하지만 이해받고 싶은 어떤 것을 쥐고서 계속 쓰고 계신가요? 당신도 그러하다면, 절절한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우리 초라한 글쓰기의 세계에 오래도록 같이 있어 보자구요. 패배의 기록들을 마음껏 부끄러워하면서요.     


-21.08.17. 사하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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