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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하 Aug 25. 2021

아무도 아닌 게 아닌 당신에게

영화 <기생충> X 황정은 소설 <양의 미래>

안녕하세요, 사하입니다. 두 번째 편지네요.

태풍이 지나가는 한 주입니다. 비를 좋아하시는지 묻고 싶어요. 우선, 저는 좋아하는 편입니다. 축축한 흙냄새도 듬성듬성한 물웅덩이도 토도독 빗소리도 좋아해요. 울적한 날에는 ‘와하하 마음껏 퍼부어라!’하고 사악하게 굴기도 하구요.

이렇게 비를 즐기는 스스로를 꽤 운치 있다 여기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질 못합니다. 영화 <기생충>이 계기인데요, 워낙 유명한 영화이니 대부분 아실 테죠. 줄거리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가난한 가족이 부잣집 저택에 위장 취업을 하는 얘기예요. 반지하방에 모여 살던 주인공 가족은 결말쯤 폭우로 인해 모든 살림살이를 잃어버려요. 집이 사라진 다음날, 그들은 위장 취업한 부잣집으로부터 가든파티에 초대받죠. 값비싼 와인을 고르던 사모님은 맑게 웃으며 말해요. “오늘 하늘 완전 파랗고 미세먼지 제로잖아. 어제 비 왕창 온 덕분에.”

새파란 하늘 아래 파티를 만끽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다워요.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는 주인공은 전날 밤 집을 잃었고요. 그 격차에서 오는 이질감을 느낀 후로 “비 오는 걸 좋아해”라고 말하기가 겸연쩍더군요. 영화를 보기 전에는 몰랐던 걸 알아버렸으니까요. 쏟아지는 비를 마냥 좋아할 수 있는 것도, 어떤 면에서 특권이라는 걸요.

제 감상은 일단 차치하고요. 얘기가 나온 김에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영화 속 부잣집 가족에겐 죄가 있을까요? 그들은 단지 몰랐을 뿐이잖아요. 주인공의 가난한 사정을, 어딘가에는 비가 오면 떠내려가는 집이 있다는 사실을요. 그들에게 비 따윈 캠핑이 취소되는 이유에 불과하니까요. 영화도 부잣집 가족을 탓하는 것 같진 않아요. 그들은 주인공 가족을 믿었다가 배신당한 순진한 피해자로 남아버리죠. 끔찍한 범죄자가 되는 건 주인공 가족이에요.

하지만 찜찜해요. 가난 역시도 주인공들의 잘못은 아닌걸요. 부잣집에 잘못을 매기고도 싶지만 그들은 정말 몰랐을 뿐이죠. 이런 탓에 영화를 본 이후부터, 폭우가 쏟아질 적마다 저는 한 가지 물음에 골똘해집니다. 모른다는 건 죄가 될 수 있을까요?


영화 기생충 중에서, 홍수에 잠긴 주인공의 집 (연합뉴스)

질문과 함께 떠오르는 소설이 있어서 소개하려 해요. 황정은 <양의 미래>라는 단편소설인데요, 줄거리는 간단하니 부디 뒤로 가지 말아 주세요.

주인공 ‘양孃’은 지하의 서점에서 일해요. 어느 날 양은 두 남자 어른과 함께 있는 소녀를 목격하죠. 세 사람의 모양새는 이상했지만 신고할 만큼 위협적이진 않아요. 양은 망설이다가 관두자고 생각합니다. 상황은 애매했고 양은 바빴으니까요. 그런데 그 소녀가 영영 사라지고 맙니다. 양은 실종된 소녀 ‘진주’의 마지막 목격자이자 ‘보호가 필요한 소녀를 보호해주지 않은 비정한 어른’이 되어버려요.

여기까지 봤을 땐 소설이 양의 무관심과 안일함을 꾸짖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독자는 오히려 무엇을 비판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집니다. 소설을 읽을수록 우리는 양에 대해 ‘알게’ 되거든요. 양의 가난과 수치심, 양이 겪어온 세계의 무심함에 대해서요. 양은 서점에 돗자리를 깔고 잠든 소녀의 어머니를 보고 생각해요.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데 내가 왜 누군가를 신경 써야 해? 진주요, 아줌마 딸, 그 애가 누군데요? 아무도 아니고요, 나한텐 아무도 아니라고요.’

우리가 양을 모를 때, 선악은 명확해요. 소녀를 도와주지 않은 양의 무관심은 나쁘고 양을 비판하는 건 정의(正義)죠. 영화도 그래요. 단순히 보면 쉬워요. 범죄를 저지른 주인공 가족은 악하고 순진하게 속아버린 부잣집 가족은 선합니다. 하지만 사건이 아닌 사정을, 사실이 아닌 진실을 ‘아는’ 이상 선악은 엉켜요. 우리는 누구를 비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죠.

다시, 성대한 가든파티에 피고용인들을 초대한 부잣집 가족의 자애를 생각해요. 양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정의로움을 생각하구요. 사나운 폭우에서 운치를 느끼는 저의 낭만도 생각해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몰라도 되는 사람들의 무결함을요. 

모르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편히 선해질 수 있는 걸까요. 얼마나 쉬이 아름다워질 수 있는 걸까요. 그리고 얼마나 무심해질 수 있는 걸까요. 무서울 만큼, 서로에게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될 수 있는 걸까요.

모르는 건 죄가 될 수 있을까요? 글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모르고자 할 때 우리는 서로를 ‘아무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거겠죠. 부잣집 가족에게 반지하의 삶 따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양을 비난하는 사람에게 양은 아무도 아닌 것처럼요.

태풍에서 시작된 생각이 지저분하게 길어졌습니다. 비를 싫어하자는 말은 아니고요. 서로를 ‘알아주자’는 식의 생색도 아니에요. 따지자면,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는 소망에 가깝겠네요. 우리가 서로에게 아무도 아니라면, 그건 너무 슬플 테니까요. 그러기 위해선 ‘모름’을 경계해야겠죠.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일을요. 그건 편한 선(善)과 쉬운 아름다움을 경계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의 결말에서요, 양은 모두가 진주를 잊은 때에도 진주의 기사를 찾아봐요. 사람들은 양은 아무도 아닌 존재로 대했지만, 양에게 진주는 아무도 아닌 것이 될 수 없었던 거겠죠. 저도 그러고 싶어요. 아무것도 모른 채로 편하게 선해지고 싶지 않아요. 쉽게 아름다워지고 싶지 않아요. 밤을 새워 진주의 소식을 찾아 헤매는 양처럼, 그저 치열하게 알고 싶습니다. 아무도 아닌 게 아닌 모든 것들을요.     


-2021.08.25. 사하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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