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하지 않으면”
변화라는 것은 어떤 이에겐 달갑지 않은 것,
어떤 이에겐 간절히 바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변해서 정말 다행이고, 그전보다 많이 좋아졌다." 긍정할 수도,
"변하기 전이 나은데? 그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부정할 수도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뚜껑을 열어보지 않으면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 알기 어려운 이 변화라는 것은 누군가에겐 정말 간절한 꿈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온 지는 꽤 되었지만 얼마 전 드라마 D.P.를 봤다. 아쉬운 현실을 다시 짚어보게 하는 내용이었지만 그 연장선상으로 사실 사람이 모여서 이루는 사회라는 구조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부조리는 언제나 잠재한다는 것에 안타깝다는 생각과 여운이 계속 남았다.
극중 탈영병들이 규칙상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도저히 살 수 없는 환경을 벗어나 조금이라도 자신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좋다 나쁘다를 가리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들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 조직된 D.P.는 간절하게 그들이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고 돌아선 그들을 설득한다.
반복된 무기력 탓일까.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다고 굳어버린 믿음은 그들의 마음까지도 더욱 굳게 닫히게 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개인의 자유 의지가 외력에 의해, 또는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역할이나 의무에 의해 모두와 똑같이 억압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좌절감을 안겨준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결코 변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무엇이 되었건 손에 만져진 동아줄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희망을 안겨준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마지막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조석봉은 그마저 좌절되는 상황에 오자 가장 안타까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변화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자력(自力)과 외력(外力)의 합으로 생겨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외로운 고뇌와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있을 것이다.
어항에 낀 녹조를 먹어치워 다시 깨끗한 물로 정화시켜주는 다슬기와 같은 사람들, 사회, 문화가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앞이 안 보여 어항 밖을 나가버리지 않도록, 미리미리 예방하고 그을리고 뿌연 마음을 닦아줄 수 있는 친절함도 녹조에 비례해서 늘어날 수 있는 변화와 확장이 유연하고, 건강한 활기가 언제나 모두에게 함께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