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열린책들] 관계자 분들께
다음의 정보를 보고 이 소설을 읽으신다면 머릿속에 BGM이 자동 재생 될 것입니다.
보다 실감 나는 독서되시기를 바랍니다.
움베르토 에코를 대신해서
어느 리코더 애호가가.
fluyt
16세기에 개발된 네덜란드 범선.
화물을 운송하는 데 사용되었다.
fluyt 또는 fluit
(네덜란드어) 리코더 recorder
Der Fluyten Lust-hof
야콥 반 에이크가
작곡한 리코더 독주변주곡 모음집.
리코더를 위한 143개의 곡이 수록되어 있다.
유럽 역사상 가장 많은 양이 수록된 단일 관악기 독주곡집이다.
야콥 반 에이크 Jacob van Eyck
(c.1590-1657)
17세기 네덜란드 장님 음악가.
카리용 연주자이자, 작곡가,
리코더 연주의 대가.
다프네 Daphne
망망대해에 표류한 주인공이
탑승하게 된 배.
또는
Der Flutyen Lust-hof에 수록된
리코더 솔로변주곡.
종 3곡의 다프네가 있다.
첫 번째 다프네는
<Doen Daphne d'over schoone Maeght>
두 번째 다프네는
<Tweede Daphne>
세 번째 다프네는
<Derde, Doen Daphne d'over>이다.
이곡은 16세기 작자미상의 영국 노래
“When Daphne did from
Phoebus fly"의 선율을
반 에이크가 변주한 것이다.
아마릴리 Amarilli (mia Bella)/
영어판 번역은
아마릴리스 Amaryllis
주인공이 처음 탄 배.
또는
Der Fluyten Lust-hot에 수록된
리코더 솔로변주곡.
원곡은 카치니 Giulio Caccini의
유명한 아리아이다.
다프네 2호 Daphne the Second
소설에 등장하는
두 번째 다프네호.
주인공의 상상 속에 존재한다.
Der Fluyten Lust-hof에 수록된
두 번째 다프네
Tweede Daphne 에서
Tweede는 네덜란드어로
'두 번째’라는 뜻이다.
눈물의 춤곡 Pavaen Lachrymae
역시 Der Fluyten Lust-hof에
수록된
리코더 독주변주곡.
원곡은 존 다울랜드의
라크리메 Lacrime이다.
Doen Daphne d'over
schoone Maeght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홀랜드에
관한 꿈을 꿨을 때
등장하는 음악가가
연주하는 곡.
곡을 연주하는 음악가는
반 에이크이다.
이곡은
그의 첫 번째 다프네.
저는 움베르토 에코의 독자이자 움베르토 에코와 같은
리코더 애호가이며 귀사에서 번역한
‘전날의 섬’ 독자입니다.
귀사의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의
첫 번째 권인
‘중세의 미학’을 세 번 읽었지만
배경 지식의 부재로
도통 이해할 수 없어
네 번째 도전을 생각 중인
독자이기도 합니다.
귀사의 ‘전날의 섬’ 한국어판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고
이 재미있는 책을 한국어로
내 주신 귀사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만,
리코더 애호가로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멋진 소설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초기 르네상스의
혼란스러운 대탐험의 시대에
표류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저는 감히 확신했습니다.
이 소설은 위에 언급한
반 에이크의 리코더 곡들과
함께 해야만 완벽해진다고 말입니다.
이 소설은 경도의 비밀을
밝히기 위한 국가 간의
은밀한 경쟁이 큰 줄기를 이룹니다.
새로운 대륙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경도를 알아내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누구입니까.
움베르토 에코입니다.
이 소설은 단순히 경도 측정에 얽힌
첩보전을 다룬 것이 아니라
17세기 유럽의 사상적 정신적
혼란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대륙을 찾아 나서는
이 시기의 유럽은
단지 물리적인 신대륙으로의
확장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신대륙으로도
확장해 갑니다.
마치 현대의 우리가
우주라는 미지의 광대함을
알게 되고
그에 따른 인식의 확장을
이루어가는 것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신/구의 대립과 혼란은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이 소설은 구조적으로도
다중적입니다.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
환상이 뒤섞여 있습니다.
첩보선의 구조가 단순하지 않듯이
소설의 구조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프네’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다프네는 주인공이 탄 배입니다.
이 배 역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반 에이크의 독주변주곡
‘다프네’ 역시
하나의 테마를 복잡하게
변주해 갑니다.
주요 테마의 선율을
변주 속에 감추어 놓고
때로는 드러내고
때로는 늘이기도 하며
서로 섞여
다중적인 구조를 이룹니다.
이 곡들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소설이 주는 분위기와
반 에이크의 곡들이
주는 분위기가
닮아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다프네‘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 나오는
반 에이크의 곡들이
비밀스럽고
몽환적이며
따뜻하고
약간은 어둡지만 밝고,
슬프지만 맑기 때문입니다.
저는 움베르토 에코가
반 에이크의 리코더 곡에
얼마나 큰 애정이 있었는지
이 소설을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한 가지 잘못된 번역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꿈속에서
과거 홀랜드의 한 장면을 재현합니다.
이 아련한 장면에서
소설 전체를 정서적으로 관통하는
다프네가 연주됩니다.
‘성가대 통로 구석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 하나가, 허공을 응시하면서 ‘
불었던 조그만 관악기는
명확히 ‘리코더’입니다.
이 소설의 영문판에는
이 장면에서 분명 'little recorder'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장면의 영문판을
올려주신 어느 친절한
네티즌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영문판 전날의 섬을
사지 않아도 됐습니다.)
영문판에서는 recorder와 flute 두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리코더를
플루트라고 불렀습니다.
앞서 독자분들께 제공한
저의 소박한 정보에도
네덜란드어인
fluyt는 리코더를 뜻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저는 [열린책들]에서 이 소설을
한국어판으로 내주신 덕분에
편하게 한국어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어판이 없었더라면
영문판(이탈리아어판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이탈리아어는
아다지오, 비바체 같은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을 사서
혈투를 벌이려다가
문득 제가 평화주의자임을
자각하고
책을 그냥 덮어놓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번역가의 ‘혈투’ 덕분에
이 책을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을
먼저 전합니다.
그러니 더욱더
이 훌륭한 번역에
옥에 티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번역가께서는
recorder 보다는
‘관악기’가 더 적당하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이 몽환적이고 진지한
장면에서 갑자기
‘리코더’
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면
얼마나 분위기를 깰까요!
이 단어의 번역을 놓고
번역가께서
얼마나 고뇌하셨을지
짐작합니다.
그러나
리코더 애호가로서는
정말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리코더라는 악기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지식이 있었더라면
번역가께서 굳이 이 단어를
고치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요.
그래도 역시
움베르토 에코가 의도한
소설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관악기’ 보다는
‘리코더’가
훨씬 더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이 글을 [열린책들]관계자분께서
읽게 되신다면
신판에서는 부디
‘리코더’로 정정해 주셨으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부디 이 애호가의
(그리고 에코의 의도를
살리기도 하는)
작은 부탁을 들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앞으로도 저는
귀사에서 발행한 움베르토 에코
관련 책들을
(평생에 걸쳐)
다 읽어 나갈 것을
약속하며
이 긴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전날의 섬’ 독자가.
움베르토 에코와 우리 리코더 애호가들은
공통적으로 리코더라는 악기의
다음과 같은 특성 때문에
늘 완벽한
소리를 내는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이러한 리코더의 특성을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 속의
반 에이크의 목소리를 빌려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악기는 살아 있는 생물 같아서,
계절에,
아침저녁의 기온에 반응하지만,
교회 안이 두루 따뜻해서
자기의 목관 악기가
늘
완벽한
소리를 낼 수 있었다.
- 소설 ‘전날의 섬’ 323p -
https://youtu.be/M7aVCcLZMmE?si=oxQ1p5yWHPlLL-ga
위 연주는 마리온 베르브루겐
Marion Verbruggen의
‘다프네’ 연주입니다.
이 연주에는 소설 속에서
반 에이크가 연주한
첫 번째 다프네
Doen Daphne d'over
schoone Maeght
와
에코가 자신의 에세이
[축구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방법]에서
언급한
세 번째 다프네
‘데르 둔 다프네 도버’
Derde, Doen Daphne d'over의
5번째 변주를 믹스했습니다.
이 연주는 마리온 베르브루겐의 원숙미와 탁월한 해석이 돋보입니다.
리코더의 소리는 더없이 투명하고 맑고
연주도 넘침이 없고 거침없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연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