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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럽여관 Aug 10. 2023

[리틀노트] 로또 같은 것도 사는 어른이 되기로 하다

n번째 퇴사 후의 결심: "기분 좋게 살면, 인생은 잘 풀릴 것이다"

세상에는 로또를 사는 사람과 사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난 극단적인 후자였다. 30년 넘게 한 번도 내 돈을 주고 복권 따위를 사본 적이 없는 인간. '노동해서 버는 돈'의 가치를 설파한 사업가 아버지를 둔 덕분에 내게 로또는 곧 과욕과 도둑 심보, 그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이름에 불과했다. 매주 토요일 로또 추첨 시간 전에 부랴부랴 로또를 사는 남편을 보며, "으이그"를 외친 횟수만 해도 수십 번은 될 터. 나의 논리는 이랬다. 

되지도 않을 로또를 사느니, 그 돈을 저금하는 게 낫겠다! 


로또로 날린 돈만 해도 얼마야, 지금껏 수백 번 로또를 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인생인데, 여전히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그런 생각을 큰소리로 했다. 5000원으로 로또를 사느니, 확실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 마시겠다!


그런 생각이 굳어갈수록 내 머리는 '인풋 대비 아웃풋이 확실한 일'만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됐다. 인풋이 고작 5000원인데, 아웃풋이 5억일 리 없다는 생각. 고생한 만큼 돈을 버는 거라는 생각.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 그러니 돈을 벌고 싶으면 일을 하고 저축을 하든, 공부를 해 투자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심드렁함 탓일까. 남편의 로또 구매 빈도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생활이 점점 재미없어졌다. 


로또를 사는 행위, 추첨 시간을 기다리는 기분, '만약 당첨된다면...'을 상상하는 것이 모두 삶을, 내일을, 미래를 기대하는 마음이었다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된 건, 번아웃과 무기력이라는 짙은 안개를 걷어낸 후였다. 자주 진지하고, 그만큼 자주 심각한 나는 평정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20대 대부분을 일희일비하지 않는 상태를 지향점으로 살았다. 그것이 강해지는 길이고, 삶의 본질(그런 게 있다면)에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삶이 내게 기분 좋은 봄바람을 보내든, 휘몰아치는 태풍을 보내든 사사로운 마음 없이 반겨주고, 보내주며 살고 싶었으니까. 그제야 내 마음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테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 어떤 일에도 무감각해졌다. 오래 준비한 일이 잘 풀려도 시끄럽게 좋아하지 않았고, 달리다 넘어졌을 때도 그러려니 반창고를 붙이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마음은 평정이 아니라 '무'에 가까워졌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심드렁, 좋은 풍경을 봐도 심드렁. 평온한 마음을 갖고자 했는데, 오히려 냉소와 비관만 늘었다. 삶이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같았다. 사는 게 시시하게 느껴졌고, 그렇게 느끼는 내 자신이 두려워졌다. 


그 어떤 자기계발서도, 동기부여를 자극하는 강연도 힘이 되지 못했다. 되려 그 모든 것이 소음처럼 느껴져 피곤했다. 그렇게 침잠하던 때에, SNS에서 우연히 본, 원래의 나라면 코웃음 쳤을, 얕고도 근본 없는 문장이 내 눈과, 정신을 사로잡았다.


기분 좋게 살면, 인생은 잘 풀려!


갑자기 정신이 번뜩였다. 순도 높은 '기분 좋음'을 마지막으로 느낀 게 언제였던가. 무엇이 두려워 즐기지 못하고, 울지 못했는가. 진짜 강하다는 건, 어쩌면 모든 일에 평정한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좋은 것을 최대로 느끼고 안 좋은 것은 기꺼이 감당하며 나아가는 힘이 아닐까? 


그날, '기분 좋게 살면, 인생은 잘 풀려'라는 메시지를 포스트잇에 적어 모니터 옆에 붙였다. 마음이 침잠할 기운이 아주 조금이라도 보이면 '기분 좋게 살자'는 말을 주문 걸듯 되뇐다. 조금 덜 심각하게 살아보자고 나를 다독인다. 그러자 생각보다 빠르게 무드가 상승세로 돌아섰다. 다시 어떤 일을 도모해 보고 싶은 마음, 글을 쓰고 싶은 마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든다.  


늘 마셔온 모닝커피 한 잔도 다른 마음으로, '기분 좋은' 마음으로 마신다. 머리를 깨우기 위해 덤덤하게, 습관적으로 내려 마시지 않는다.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있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 그렇게 한 모금, 한 모금 끝까지 마시면 기분이 좋아져 있다. 겨우 커피 한 잔으로도, 어쩐지 오늘 하루가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을 느낀다.


오늘의 나는, 일부러라도 더 기분 좋게 살자고 생각한다. 기꺼이 로또를 사는 어른이 되자고 다짐한다. 달큰한 여름 가지(제철 음식에 의미를 부여한다!)를 구워 올린 덮밥을 요리해 먹고, 남편과 나란히 앉아 "우리 만약에 당첨되면, 당첨금으로 뭐할까?" 이야기한다. 우리는 머릿속에서 한적한 교외에 집을 짓고, 세계 여러 나라를 탐험하고, 다양한 미식과 스포츠를 즐긴다. 


인생의 재미나 즐거움은(불운이나 슬픔과 마찬가지로) 종종 '인풋 대비 불확실한 아웃풋'에 숨어 있다는 걸,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계산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삶은 그렇게 살아내는 게 아니고, 살아지는 것도 아니니까. 내일 또 더러워질 창틀인 걸 알아도, 오늘은 일단 기쁘게 닦아내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내일의 먼지는, 내일의 내가 씩씩하게 청소하리라 믿는 마음이 반갑다. 


(*(당연히)도박이나 무분별한 투기 따위를 권하는.. 그런 메시지를 전하려는 게 아니다. 순간적인 쾌락(기분 좋음)에 이성의 끈을 놓으라는 말도 아니다. 이미 삶을 즐겁게 긍정적으로 살아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가닿지 않을 이야기라고도 생각한다. 다만, 몇천 원 선에서 로또를 사는 마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최근의 지극히 개인적인 심리 상태 변화를 간단히 기록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자주 심각해지는 마음이 힘든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복권은 삶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책임감 있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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