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과 이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단행본 발간 기념 북토크를 마치고 기분이 좋아 선배와 거하게 양갈비를 뜯었다. 평소 마시지도 않던 알코올까지 곁들일 만큼 퍽 만족스러운 저녁이었다. 느즈막이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고 있는데 앗? 갑자기 속이 울렁울렁하고 배가 살살 아파왔다. 촌스럽게 비싼 양갈비 좀 먹었다고 이러는 걸까? 참다 참다 안 되겠다 싶어 다음 역에서 내리기 위해 지하철 문 앞에 섰는데,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더니 내가 지하철 바닥에 누워있는 게 아닌가. 벌떡 일어나 열린 문 사이로 비틀거리며 내렸다. 머리는 계속 빙글빙글 돌고 속이 메스꺼웠다. 결국 화장실까지 가지도 못하고 지하철 쓰레기통에 구토를 하고 말았다.(정말 죄송합니다. 환경미화원님...) 한동안 의자에 앉아 손을 주무르며 휴식을 취했더니 다시 상태가 멀쩡해지는 게 아닌가. 32살, 아직 이렇게 갑자기 쓰러질 나이는 아니지 않는가? 하긴, 그럴 나이가 어디 있긴 한가 싶다. 난생처음 겪는 일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 뒤로도 앉았다 일어나거나 누웠다 일어날 때마다 눈앞이 캄캄해지거나 중심을 못 잡고 넘어질 뻔한 일이 잦았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구토를 하는 날도 생겼다. '나 어디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등줄기가 섬뜩해져 인터넷 검색창에 증상을 이리저리 검색해보니 아무래도 내 병명은 '기립성 저혈압' 같았다. 기립성 저혈압은 갑자기 몸을 일으킬 때 순간적으로 핑 도는 증상을 호소하면서 때론 기절을 하기도 하는 병을 말한다. 하지만 내가 기립성 저혈압이 나의 병명이라고 추측한 데에는 증상보다는 원인에 있었다. 항우울제 복용.
얼마 전 바꾼 항우울제가 아무래도 부작용을 야기한 듯했다. 살을 10키로나 찌게 하더니 이젠 기절까지 시킨다. 병원에 가 증상을 말했더니 역시나 약 때문인 것 같다고 한다. 요즘 증상이 많이 호전되어 점차 약의 용량을 줄여가던 터라 이참에 조금 더 약의 용량을 줄였다. "올해 안에는 약 끊을 수 있겠어요." 곧 약과 이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한들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알죠?" 선생님은 매주 같은 말을 주문처럼 내게 주입한다. 처음에는 오히려 반감까지 불러일으키던 말이었다. '나한테 일어난 일을 어떻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어?' '이게 어떻게 아무 일도 아니야?' '더 나빠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한다고?' 하지만 주문은 통했다.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 내가 어쩌지 못할 일도 있다는 걸.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고 포기해야 하는 일도 있다는 걸. 여전히 그 사실이 받아들이기가 힘들지만 조금씩 체념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