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섞어찌개'에 숨겨진 의미
산을 오르는 것 같은 숨가쁨을 경험해야만 만날 수 있는 곳, 거기가 우리 집이었다. 90년대 초반의 서울의 북쪽에 위치한 산동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와 형들, 그리고 나는 각자의 위치에서 고군분투하며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비량’으로 선교를 하기 위해 일용직 노동을 서슴지 않았다. 한 푼 한 푼 벌기도 쉽지 않은 돈이었지만 돈이 모이면 그는 선교를 위해 아쉬움 없이 그가 피난민 시절에 태어났던 만주 대륙으로 떠나곤 했다. 아버지의 공백은 여지 없이 어머니가 메꿔야 했다. 그녀는 마흔 여섯에 낳은 막둥이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일을 쉴 수 없었다. 순수했던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파출부’라는 직업이 무엇인지 몰라서 기꺼이 학부모의 직업란에 그것을 적어냈었다. 아마 그 이후로 선생님이 더더욱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셨던 것 같다. 다행히도 그 때의 선생님들에게는 그러한 따스함이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누나는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바로 취직했다. 형들은 모두 대학생이었다. 우리 집은 모두가 ‘자비량’이었다. 아버지도 자신이 받은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일했고, 형들도 집에 기댈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장학금을 받아서 학업을 이어갔다.
식구들에게는 모두 각자의 전쟁터가 있었다. 그 전쟁터에서는 늘 전투가 한창이었다. 아버지는 가정을 늘 사막의 오아시스에 비유하시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묘사’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나를 제외한 모든 식구들은 정말이지 ‘사막’과 같이 살았다. 그들에게 있어 가정은 유일한 안식처였을 것이다. 유일하게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 그들에게 아마 큰 위안이 되었으리라.
나는 하루 종일 식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정말이지 심심하고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 식구들이 많은 집인데 모두가 나만 빼고 바빴다. 나는 식구들이 집을 비운 사이, 책장에 꽃혀있는 책들을 읽어내려갔다. 어린이용 책은 별로 없었다. 주로 20대였던 형들이나 누나가 사 놓은 소설이나 어려운 책들이 많았지만 나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언젠가 기형도 시인의 ‘엄마 생각’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시에 내 그 때의 심정이 담겨있는 것 같아 마음이 뜨거웠었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 사이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식구들이 돌아왔을 때가 나는 무척 기뻤다. 우리 집의 저녁 밥상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메뉴가 딱히 중요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새로 재료를 사 와서 요리를 하시기 보다는 집에 있는 재료를 알맞게 배합해서 요리를 하시곤 했다. 그것은 요리를 할만한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 사람의 최선이었다. 굳이 그 요리에 이름을 붙이자면 ‘섞어찌개’에 가깝지 않았을까 싶다. 모두가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을 맛있게 해치웠다. ‘해치웠다’는 것이 ‘먹었다’는 표현보다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상해서 버려지는 음식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 어려운 형편에서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특히 아버지는 음식을 남기는 법이 없으셨다. 그 분은 음식을 남기지 말라고 가르치시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음식을 남기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만약 남기기라도 하면 ‘꾸짖음’이 오는 대신에 그 음식들이 아버지의 입으로 들어갔다. 80년대 중흥기를 넘어 이제 풍족함이 가정의 밥상에까지 전달되던 시대였지만 나는 말로만 듣던 70년대의 보릿고개와 같은 분위기에서 밥상을 맞이하곤 했다. 어려움의 질적인 면은 70년대와 비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음식에 대한 ‘감사함’에 대해서는 아마도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섞어찌개'를 포털 사전에서 한 번 검색해본다. 놀랍게도 사전에 등재된 공식적인 언어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기와 여러 가지 야채를 섞어서 끓은 찌개'
맞다. 엄마의 섞어찌개에는 '그런 것'들이 들어있었다. 고기와 여러 가지 야채들. 그것들의 조합이 어울리는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무엇이 들어갔었는지 지금에 와서 하나하나 묘사하기도 어렵다. 엄마의 요리의 목적은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사랑하는 식구들에게 안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식구들은 그 안식을 누리느라 거기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못했던 것이다. 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은 유일한 참관자인 나만이 가끔 고기 반찬이 없으면 고기를 해 달라고 어머니께 조를 뿐이었다.
우리의 ‘밥상’에서는 ‘맛’이 주인공이 아니었다. ‘맛’보다 중요했던 것은 ‘대화’였다. 부모님과 4남매가 북적였던 우리 집은 그 북적임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아버지는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좋아하셨다. 나는 90년대의 학교에서도 권장받지 못하던 ‘토론’을 집에서 원없이 했던 것 같다. 주제는 주로 신앙적인 영역이었지만 거기에 한정되지만은 않았고, 확장되어 사회 전반에 대한 이야기들로 번지곤 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피난과 전쟁을 경험한 부모님들과 민주화 과정을 직접 통과하던 자녀 세대 간에는 늘 치열한 토론이 있었다. 그것은 시대와 역사가 낳은 산물이기도 했고, 우리 나라의 역사가 얼마나 기괴할 정도로 빠르게 흘렀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세대를 초월하고, 생각을 넘어서는 가시적인 가교(假橋)가 바로 ‘밥상 위’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밥상머리가 ‘똘레랑스’의 자리였다. 서로의 차이를 참을 뿐 아니라 관용하고, 오히려 각자의 의견들을 더욱 독려할 수 있었던 건 이러한 토론 문화가 밥상 머리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토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전쟁 통에 생각하고, 느꼈던 것을 밥상 머리에서 나누고 있는 것 뿐이었다. 지금 그 때의 밥상을 떠올려보면 ‘광장’이 생각난다. 각자가 고군분투하는 자리에서는 차마 할 수 없는 것들이 모두 용인되는 그 자리는 ‘광장’과도 같았다.
시간이 흘러 4남매 모두가 각자의 가정을 가지게 되었다. 모두들 전쟁터에서 나름 선방한 것 같다. ‘서울’이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치열한 전장에서 살아남느라 아마 그들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 사이 조카들도 대학생이 되어 갔다. 아마 그들은 우리 4남매와는 결이 다른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가끔 그 때 좁은 집에 모여 살던 때를 회상하곤 한다. 나는 마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꼬맹이처럼 살얼음판 같은 전쟁터를 놀이하듯 지나치고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전쟁 속에 많은 것들을 잃었고, 상처도 입었지만 밥상은 늘 그 자리에 놓여 우리 마음을 치유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그 난리를 겪고도 다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지금도 씩씩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무엇이든 이야기하고 포용할 수 있는 그 자리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지금의 밥상은 어떻게 기억될까? 아내가 아이들의 영양에 대해 하나하나 정성을 쏟는것을 바라본다. 식사시간에는 편안한 음악이 흐르고 아들은 맛있는 음식 앞에서 엄지를 치켜들며 웃고 춤도 춘다. 세상 최고의 쉐프라는 멘트의 스윗함도 빼놓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은 그 때 전쟁을 치르고 집에 돌아오던 그들의 치열함이 있었기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편안함과 달콤함일 것이다. 그 때의 밥상에 비해 참가자 수가 많이 줄었다. 예전과 지금의 밥상의 공통점이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다.
이 아이는 지금의 밥상에서 어떤 맛을 기억하게 될까. 혹은 나처럼 맛보다 이야기를, 혹은 분위기를 기억하게 되려나. 우리집 밥상의 행복을 지켜보며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본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가족들과 함께 먹는 밥이 제일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