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글은 사진과도 같아서 그 순간순간들의 내면을 박제하곤 한다. 우리가 사진을 찍으려면 옷매무새를 다듬는 것처럼 글 역시 쓰기 이전에 저자는 삶의 매무새를 다듬게 마련이다. 안정된 삶과 내면 속에서는 그것들이 가능했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의 내 삶은 다듬어지지도 다듬을 수도 없는 울퉁불퉁한 궤적을 그려내었다. 그 알 수 없는 과정은 통제의 영역 바깥에서 시작하여 내 자신의 내면을 송두리째 갈아내었다.
이제 오랫동안 쓰지 못한 글을 다시 써 보기로 한다. 삶의 매무새를 단정히 할 수 있던 예전의 그 때로 돌아와서가 아니다. 오히려 다듬어지지 않고, 다듬을 수도 없이 울퉁불퉁하기만 한, 그래서 매끄러운 글로는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어진 내 삶과 내 속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기로 했기 때문이다. 빙산의 보여지는 일각이 아니라 겉으로 보여지지 않는 거대한 내면의 모습을.
답을 잘 내려줄 수 있는 선생님보다 아직은 어리고 삶이 서투른 친구에게 고민을 상담하는 것이 때로 더 큰 위로가 될 때가 있다. 훨씬 더 경험이 많은 선생님보다도 아직은 미숙한 친구를 찾는 이유는 아마도 그 과정을 함께 겪어나갈 때 느끼는 일종의 동질감과 유대감이 아닐까.
나는 내 삶과 변화되고 있는 내면을 존중하기로 함과 동시에 글을 쓰기로 했다. 그것은 울퉁불퉁한 것을 매끈하게 포장하고자 하는 압력에서 자유로워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동일하게 서투른 여정을 탐험하고 있는 동지들에게 답이 되어주기보다 위로가 되고 싶다는 마음과 어쩌면 결을 같이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끄럽지 않고, 정돈되지 않은 나의 삶은 독자라는 손님을 초대하기에는 망설여질만큼 여전히 그리고 한없이 부끄럽다. 여행을 이미 다녀온 여행자에게 길을 묻는 것이 확실하고 현명한 방법이겠거니와, 혹 여행을 함께 하고 싶은 동시대의 독자들이 있다면 진심으로 환영한다. 누추한 마음의 집이지만 오신 독자분들이 삶이라는 여정을 보다 행복하게 동행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