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지옥'이라고 쓰고, '종교의 역사'라고 읽습니다
드라마 ‘지옥’은 연상호 감독 작품이며 연 감독과 최규석 작가와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연상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단연 ‘부산행’이다. 봉준호 감독을 능가하는 지독한 염세주의자. 이상적 세계를 그리기보다 늘 디스토피아를 먼저 그려내는 풍유적 재능을 그는 이번 작품에서 제대로 ‘시연’한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이번 작품에서 그는 ‘종교’의 영역을 다루었다. 필자가 보기에 이 작품은 종교의 기원에서부터 성장, 부패, 개혁에 이르는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을 거의 총망라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정도로 종교와 사회, 개인의 상호 작용과 욕망을 꿰뚫어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 결과일 것이다. 그는 드라마가 공개된 후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본인도 ‘교회에 다닌다’고 말했다. 그는 어떠한 고민을 했고, 어떠한 경험들을 했기에 마치 종교 내부자가 고발한 것 같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작품에 흡인력을 주는 초자연적 현상은 생각보다 굉장히 단순하다. 이는 ‘고지’와 ‘시연’, 단 두 가지이다. ‘고지’는 천사가 어느 순간 인간에게 나타나 이름을 호명하고, 몇 날 몇 시에 죽어서 지옥에 간다는 예언을 하는 것을 말한다. ‘시연’은 고지를 받은 날짜와 시간에 실제 ‘지옥의 사자’들이 나타나 고지 받은 사람을 처단하고 어디론지 모를 내세에 데려가는 것을 말한다.
이 초월적 현상은 작중 2004년부터 ‘정진수’(유아인 분)라는 인물에 의해 온라인 상에 소개된다. ‘정진수’는 처음에는 ‘새진리회’라는 일종의 종교 네트워크를 만들어 오랫동안 소통해온 일종의 인플루언서였다. 그의 교리는 10대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인터넷 루머 정도였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갑작스런 ‘시연’이 이루어지면서 상황은 급반전된다. 2021년 11월 10일 오후 1시 20분, 서울 상암동의 한 커피숍 안에서 그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일상적인 커피숍으로 한 남자를 찾아온 정체불명의 괴수들. 이들에 의해 한 남자가 처참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남편 없이 어린 아이 둘을 키우는 ‘박정자’(김신록 분)라는 인물에게 다시 천사가 등장하여 ‘고지’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고지’에는 신의 의도가 담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이 사람이어야 하는지, 어떠한 이유로 지옥에 가는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새진리회’의 의장인 ‘정진수’(유아인 분)는 고지를 받은 이 여성에게 30억원의 물질적 대가를 주는 대신, 다가올 ‘시연’의 생중계를 허락해달라고 제안하게 된다. 남게 될 아이들을 위해 제안을 받아들인 박정자는 시연 당일 수많은 군중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데려감을 당하고, 이를 사상 초유의 생중계로 지켜본 사람들은 삶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박정자 시연 사건은 종교의 탄생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이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든 명확한 답을 찾으려고 하게 된다. 혼란에 빠진 인간들에게 단순명료한 답을 제시해주는 것, 극 중 이 역할을 하는 인물이 바로 새진리회 초대 의장, 정진수이다.
우리는 더 정의로워야 합니다.
정진수(유아인 분)는 신의 의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더 정의로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고지와 시연은 특정한 개인의 가시적(visible)인 죄 때문이라는 것이 정진수의 해석이다.(그들의 교리에서 내면적인 죄는 지옥행의 이유에 포함되지 않는다.) 즉,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죄를 짓지 않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진수는 스스로 이미 수년간 본인 나름의 정의로운 삶을 선보였고, 고지와 시연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기에 군중들은 그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이것은 어쩌면 일반적인 종교의 탄생 과정을 집약해놓은 장면일 수 있다. 사람들은 어떤 현상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거나 의심하기보다 전문가가 내려주는 명쾌한 답을 기다리기 쉽다. ‘정진수’와 ‘새진리회’는 이 지점을 깊이 파고든 종교 조직들의 표상이다. 현상에 대한 해석을 철저하게 위임받은 ‘새진리회’와 이들의 교리를 극단적으로 받아들인 근본주의자들, ‘화살촉’은 이후 군중에게 완전히 주입된 공포심을 기반으로 사회 전반의 기득권을 형성하게 된다.
단순명료한 교리로 군중들을 완전히 장악한 정진수(유아인 분)에게 진경훈 형사(양익준 분)의 목소리를 빌려 연 감독은 질문한다.
그 쪽이 믿는 신은 인간의 자유 의지는 중요하지 않은가보죠?
자유 의지를 반납하고, 오로지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는 공포심이 지배하는 사회. 언뜻 들으면 범죄가 줄어들고 더 나은 세상이 될 것 같겠지만 작품은 자유의지와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인간의 수동적 모습을 디스토피아적으로 표현한다. ‘고지’를 받은 아빠를 대신하여 어린 딸이 아빠의 죄를 울며 미디어 앞에 고하는 장면, 교리적인 힘을 등에 업고 온갖 폭력을 휘두르는 ‘화살촉’의 모습은 모두 인간의 사유 기능이 실종된 모습의 극단이다. 이는 프로이트나 에리히 프롬이 말한 ‘자아의 상실’, ‘자유로부터의 도피’와도 맥을 같이 하는 모습이다.
개인적인 자아를 버리고 자동인형이 되어 주위 수백만의 다른 종이인형들과 동일해진 인간은 이미 고독이나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대신 그가 지불한 대가는 혹독하게 비싼 것으로, 그것은 자아의 상실이다.
-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중에서
‘새진리회’가 종교의 영역을 넘어 미디어를 포함한 사회 전반을 장악해나가는 모습은 몽환적이면서도 매우 현실적이다. 이렇듯 종교의 힘은 인간들의 삶의 가치 판단을 통째로 위임받았을 때, 가장 극대화된다.(그것은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인간이 사유하지 않을 때, 전적으로 위임된 종교 권력은 결국 ‘인간다움’을 파괴하고 만다. 이 지점에서의 종교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종교 뿐만 아니라 파시즘과 같은 사상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고 만다.
결국 작품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청중들의 가슴 속에 남기는 듯 하다.
삶의 구체적인 형태마저 정치와 종교 권력에 위임한다면 그 안의 개인들은 과연 어느 지점에서 자기다워질 수 있는가.
‘자유의지’를 반납한 선은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으로 볼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공포심으로 억제된 욕구와 죄는 과연 인간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가.
작품은 인간 소외가 가속화되는 세계의 대척점에 ‘소도’라는 일종의 ‘독립군’을 세워놓는다. 민혜진 변호사(김현주 분)를 필두로 하는 이들은 ‘고지’와 ‘시연’이라는 현상을 일종의 ‘자연 재해’로 해석한다. 누가 특별히 더 나쁜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그저 임의로 일어나는 자연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들은 고지를 받은 사람들이 죄책감을 가지거나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들의 이러한 계몽적 움직임은 사실상 종교 권력을 해체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으므로 ‘새진리회’나 ‘화살촉’과의 대립은 불 보듯 뻔한 설정이 된다.
작품은 후반부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바로 배영재(박정민 분)와 송소현(원진아 분)의 아기에게 고지가 내려진 것이다. ‘소도’ 사람들에게 있어 아기의 시연은 자신들의 가설을 입증하고 대중들을 종교의 굴레에서 해방시킬 절호의 기회가 되지만 부모의 마음은 복잡하고 슬프기만 하다. 작품에서 민혜진(김현주 분)과 배영재(박정민 분)는 사유와 의심을 멈추지 않는 주체적 인간상의 표상이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신의 의도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뿐이다. 또한 신의 의도를 타인에 대한 잣대로 들이대지 않는다. 그리고 신의 속성을 오해하여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대중들의 무관심과 무지성에 강력히 도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민혜진(김현주 분)과 배영재(박정민 분)은 암흑기의 종교개혁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의 의심과 사유는 구텐베르그 성당에 반박문을 써붙이던 루터의 패기와 묘하게 닮았으며 자유의지를 반납한 형태의 위장된 선을 행하며 우월감에 젖어 있던 당시 유대인들을 향해 연민 어린 항변을 하던 바울의 모습과도 조금 닮았다.
결국 드라마 ‘지옥’은 종교를 비판하는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신의 허구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작품은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사유하기를 망각한 인간들을 향하여는 동정의 시선을, 자아를 상실한 군중들을 유린하는 모든 형태의 권력을 향하여는 냉소의 시선을 보내는 듯 하다.
작품 ‘지옥’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종교의 역사를 훑어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현상에 대한 해석을 위임 받아 탄생된 종교가 어떻게 힘을 키워나가게 되었는지. 특정 권력에게 선과 악의 가치 판단이 위임된 사회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이다. 작품은 이를 특정 종교를 소환하는 대신 ‘새진리회’라는 가상의 종교를 통하여 풍유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연상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작품이 수많은 질문과 이야기들을 만들어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작품의 CG의 퀄리티나 연기력도 이야기될만한 이슈지만 어쩌면 인간 본연의 고민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끄집어내어서 전 세계인들에게 질문을 던진 것만으로도 필자의 생각에는 작품의 의의가 성립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이성이 더 발달하면 더 세상의 본질에 가까워질 것 같았는데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도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옛날에는 교황 같은 종교 권력이나 파시즘 같은 사상이 인간을 억압하고 소외시켰을지 모르지만 오늘날에는 정보를 편식하는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는지도.
지금도 수없이 말살 위기에 놓인 인간의 '자유 의지'를 회복하고, 억압되고 종속된 자아를 해방시켜줄 수 있는 대안은 오히려, '종교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에 있는 것은 아닐지 이 작품을 보며 생각해보게 된다.
늘 자유로부터 도피해 온 인간들에게,
신은 오히려 진정한 자유를 주려고
지금껏 '종교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