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3.22 작성
청량리 588은 미아리 텍사스와 같이 성매매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던 집창촌이다. 이름의 유래는 동대문구 전농동 588번지 일대에 있고, 청량리역 바로 옆에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규모가 작지 않고 역사가 제법 오래된 곳이지만, 오랫동안 철거와 재개발 논의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다 2015년, 청량리 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본격 철거작업에 돌입했다. 앞으로는 롯데건설이 65층 높이의 주상복합 아파트를 건설할 예정. 벌써 철거작업이 한창이다.
초-중-고를 살았던 남양주시에 살 때는 서울에 가려면 청량리행 버스를 타야 했다. 지금은 남양주를 관통하는 경춘선, 경의중앙선이 다니고 있지만, 당시에만 해도 청량리와 화도읍을 이어주는 330-1번 파란 버스와 30번 초록 버스가 서울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이었다.
그때만 해도 청량리역 근처에 집창촌이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가끔 어머니께서 "청량리역에 가거든 오른쪽 길로는 절대 들어가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나는 걸 보면, 어머니는 이미 알고 은연중에 걱정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그나마 588 골목이 쉽게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 오늘까지도 그 위치를 모르고 있었지만, 청량리역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인근을 배회하다가 우연히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세기말적인 풍경에 "아, 여기가 그 유명한 청량리 588이구나"했을 뿐이다.
청량리역 롯데백화점에서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이런 폐허가 나온다.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청량리 588의 현장. 지금은 70%가량 철거가 진행되어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가씨들의 영업이 성행했을 골목과 점포. 지금은 철거를 알리는 붉은 스프레이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현장에는 바로 얼마 전까지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미용 도구와 생필품들이 어지럽게 버려져있었다.
588의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지역, 공간 안이 몇몇 상가를 제외하곤 모두 이런 집들로 가득 차있다. 아직 2~3집은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모양인지, 부서지지도 붉은 스프레이가 뿌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 진행됐다면, 그들도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다.
기독교인인 나에겐 소돔과 고모라 같은 곳이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식당, 교회, 미용실 등 사람이 살던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철거가 진행되는 가운데서 치열한 싸움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낙서들도 많이 볼 수 있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던 곳이지만, 여러모로 사람 냄새나는 공간이다.
성매매가 성행했을 때는 영영 꺼지지 않을 불야성 같은 곳이었겠지만, 조만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곳이다. 하지만 아직은, 이곳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을 만큼의 흔적이 남아있다.
청량리 재개발 조감도. 청량리역 바로 옆에 65층짜리 건물이 으리으리하게 들어설 예정이다. 이곳에서는 청량리 청과시장과 제기동 약령시장이 다 내려다 보일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바라보면, 집창촌이든 왁자지껄한 시장이든 똑같아 보이겠지. 건물의 수명이 다하면 깨끗하게 밀어버리고, 새로운 고층 빌딩을 지어 투자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보이겠지.
집창촌은 역사 문화적 가치를 가지지도, 사회적 동정도 얻지 못하는 곳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가 일어난 곳이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반인륜적인 폭력 행위도 많이 일어났을 곳이다. 그렇기에 이곳을 없애는데 반대하는 사람은 극소수의 이해관계자뿐일 거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는 아무런 기록도, 흔적도 남지 않고 깡그리 사라질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강제로 머리가 반쯤 빡빡 밀린 것 같은 이곳을 보다 보니 내가 사는 동네가 생각난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이태원에도 청소년 출입금지 지역이 있다.
일명 '후커힐'이라 부르는 이태원 환락가. 왼쪽 표지판이 청소년 통행제한구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외국인들이 주 고객이며, 트랜스젠더 바와 바, 방석방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나마 낮에는 청소년들도 통행할 수 있다는 게 588에 비하면 나은 점이다.
밤에는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끈적한 분위기로 바뀐다. 가끔 걸어가다 보면 상의를 노출한 형인지 누나인지 모를 사람들이 "Hey boy"하며 손짓을 보낸다. 그나마도 내가 이곳을 자주 왕래하는 주민이라는 걸 안 뒤부터는 안 하지만.
청량리 588에서 우리 동네가 떠오른 이유는 여러 가지 비슷한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후커힐 또한 한남 뉴타운에 속한 재개발 추진 구역이다. 그리고 미군부대 이전과 불경기로 인해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 주점을 가장한 성매매 알선업소라는 것도 같다. 그나마 청량리에 비해 규모가 작고 '트랜스젠더'라는 특이성이 있긴 하지만, 조금만 더 활기를 잃으면 금세 밀어버리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설 것이 뻔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누군가의 이윤을 위해 그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성매매'라는 윤리적인 문제가 끼어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재개발/젠트리피케이션과는 다르다. 성매매는 하고 싶어도 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2004년 성매매 특별법이 승인되어 성매매는 공식적으로 매장되었다. 성매매를 좋게 보는 종교는 없으며, 관련 활동을 하는 인권단체도 많지 없다. 보기 싫고 집값을 떨어뜨리는 집창촌을 밀어버리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간을 없앤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그곳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는 어떤 대화들이 있었을까? 그리고 588을 떠난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사라져 가는 후커힐의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아마 성매매가 가능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을 거다. 그거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눈엣가시 같은 성매매 업소들을 밀어버리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른 일을 찾도록 돕고,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주는 일은 쉽지 않다. 나 또한 이들에게 적합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까지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어떤 대책이 가능하냐 물으면 할 말이 없다.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으려면 이들과 눈높이를 맞춘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하지만 이 사람들의 주 고객층인 젊은 남성으로서, 그리고 이런 삶을 이해할 수 없는 도시 출신의 예수쟁이 샌님으로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