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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리매트릭스 May 15. 2024

맞바람의 원리

부부 충돌


외투 벗기기




나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바람과 해님이 누가 먼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느냐 내기를 한다. 바람은 나그네에게 바람을 불어 외투를 벗기려 하지만 나그네는 외투를 더욱더 여밀 뿐이다. 의기양양한 해님은 나그네를 덥게 만들어 스스로 외투를 벗게 한다.




부부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떠올린다.

우린 크게 싸우는 일이 없다. 24시간 이상 갈등이 넘어간 적도 없다. 그래서 싸움이라는 말보다는 충돌이라는 말로 대체해 보았다.

 나와 남편의 마음속에는 바람도 있고 해님도 있다.

 바람과 해님 이야기는 대부분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이 이긴다는 교훈으로 알고 있다.

심지어 대다수의 관련 삽화들을 보면 해님은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고 바람은 드센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이 이야기의 핵심이 해님의 온화함 자체가 아니라 방법이 그 상황에서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인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바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빠른 결과만을 추구하는 무의식이해님은 본질을 들여다 보고 시간을 들여 원하는 결과를 얻는 깨어있는 의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계속해오던 대로 편한 사고와 행동을 선택한다.

그것은 무의식으로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나그네의 외투를 벗겨야 한다고 판단한 순간 내가 하고 싶은 대로의 욕구를 따라가게 되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흐름대로 바람만 불다 보면 결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특히 그것이 상대의 선택에 달려 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내가 바람을 불었을 때 나그네의 외투를 벗길 수 있을까?

외투를 찢어버릴 작정이 아니라면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고, 설령 찢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찢어진 것이지 벗겨진 게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면 그 이유는 부드러움 때문이 아니라 본질을 보는 힘에 있을 것이다. 


사건일지


부부충돌은 서로의 외투가 거슬려 불편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것을 벗겨야 마음이 편해지는 상황에 놓여있다고 해보자.


상대외투를 벗겨야 한다->바람을 불면 벗겨지겠지(나의 습관적인 무의식의 선택)->왜 안 벗겨지지?->더 세게 분다->왜 안 벗겨지지?->아! 상대도 인간이다->인간은 습관화된 동물이다(나처럼)->상대바람을 불면 오히려 추워져 옷깃을 여밀 것이다->점점 벗기기 어려워지겠구나->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더우면 벗겠구나->따뜻함이 필요한 걸 인지한다->해님을 부르는 것은 나의 습관을 거스르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무의식을 거스르는 것을 견딜 수 없다->해님이 어렵고 힘든 선택이라는 것을 인지를 한다->어느새 바람을 불고 있는 나와 옷깃을 여미는 상대를 발견한다.


이처럼 해님의 필요성을 의식하고도 선택을 못할 수도 있다. 당장은 감정이 앞서 바람이 너무나도 불고 싶고, 그 조바심은 바람을 불면 외투가 벗겨질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무의식을 거스르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내가 보는 나그네의 외투는 바람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너머에 있다.




나그네는 관계를 의미한다.  외투를 벗기는 것은 관계 사이의 갈등의 사건이다.


남편은 나에게 무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내 외투를 벗기려고 한다,

남편이 바람으로 내 외투를 벗기려고 할 때마다 나는 바람을 불지 말고 해님을 사용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말한다,

남편은 외투를 벗기는 것이 목적일 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를 매우 불편하게 여긴다. 당장의 외투를 벗기는 것에 몰두한 나머지 해님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에게 나그네의 외투 같은 사건은 남편이 부는 바람이 야기하는 그의 말과 행동들이다. 나 역시 그 상황이 되면 남편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에 현혹되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나도 똑같이 바람을 불게 되는 것이다.

당장의 정서적인 불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분은 선택할 수 없어도 그 태도를 선택하는 의식은 분명 그 너머 어딘가에 있다.


누구에게나 해님은 바람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으로 20년간 충돌하고 있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마 끝은 없을 것이다. 나의 외투를 벗기고 싶을 때마다 남편은 바람을 불고 나는 그것을 불편해한다. 나는 남편에게 외투를 벗기고 싶으면 햇빛을 쏘이라고 방어하며 계속해서 옷여민다. 남편이 나로 인해 화가 날 때 그 기분을 표출하는 방식이 나에게는 돌풍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처음 야기되었던 남편의 기분 문제를 순식간에 퇴색시키고 나도 모르게 옷깃을 있는 힘껏 여민채 그에게 맞바람을 불게 한다.

서로의 외투를 찢어라도 놔야겠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 악순환에서 둘 중에 하나라도 감정의 늪에서 빨리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감정이 섞인 바람을 아무리 불어대보았자 상대는 그 의중을 절대 알 수 없고 외투를 여밀 뿐이다.


내가 애초에 원했던 것이 당장 바람을 부는 것인지 상대의 외투를 벗기는 일인지 잊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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