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처음 어린 자아를 만나 내면을 치유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저 표면적으로 '유년기의 나'만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채워지지 않은 욕구나 폭력으로 인한 상처를 직면하면서 자연스럽게 머릿속에는 유년기의 내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대다수의 정신과 상담이 그렇지만 마지막은 결국 어린 시절 내 안에 깊이 박힌 이야기가 근본적인 문제의 시점이 되고
그것을 직면하고 어루만져줌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게 된다.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어린 자아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영유아기부터 지금까지의 나다.
내가 오랜 시간 습관적으로 사고하고 선택하기를 반복하는 삶을 살았다면 어제의 나도 그랬을 것이고 그것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어린 자아는 가끔씩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다 큰 모습으로 항상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미디어나 매체에서 주인공이 상처를 치유할 때 그의 어린 시절을 어루만져 주면 내면의 상처 입은 어린 그가 마음이 풀린 듯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연출을 한다. 나도 이런 경험이 몇 번있다. 처음 정신과 상담을 시작했을 때도 그랬고 최근에 상담에서까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람은 관성적으로 다시 이전의 사고나 선택의 습관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꾸준히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관가하고있던 것이다.
내가 지하철 공포 노출훈련 시 인지교육 관련 도서들과 병원인지상담치료의 일환으로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과 답을 만들어서 했었다. 그 당시 주치의 선생님께서 질문을 할 때 어린 자아에게 하듯이 해보라는 제안을 하셨고 이후 내가 두려움에 무너지려 할 때마다스스로 질문을 하고 답을 하는 루틴을 반복한 적이 있다. 또는 그 이외에도 명상을 하며 찾기도 하였는데 분명 처음 떠올린 것은 유년기의 나였지만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것을 반복하던 어느 날 그 어린 자아는 어느 특정 순간의 내가 아니라 그것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된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내 머릿속에 겉모습만 어린아이 일 뿐 나의 어린 자아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리다는 프레임이 만든 이미지일 뿐이지 결국 어제의 나도 그 어린 자아가 자라서 만들어진 나였다.
선택권이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나를 어루만져주는 것은 확실히 필요한 과정이다. 하지만 이후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의 나도 어루만져져야 한다. 어른이 된 나 역시 그 어린 자아가 바탕이 되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여 어리석은 사고를 하고 선택을 하는 자신을 책망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지금의 나또한 어린 자아의 영향력에 있음을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의 어제는 나이 먹은 어린 자아일 것이다.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매번 머릿속에 떠올리던 이미지의 진짜 어린 나를 만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