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정해놓은 길을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
친구들과 경쟁하며 걷는다
각본대로 짜여있는 뻔한 인생의 결론 향해
생각 없이 발걸음만 옮긴다
세상은 날 길들이려 하네
이제는 묻는다 왜
<N.EX.T-The Destruction of The Shell (껍질의 파괴) 중>
인간만큼 길들여지며 살아가는 동물이 있을까?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프로를 보면 반려견 또한 인간만큼이나 길들여져 살아가는 동물이지만,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만큼은 아니다. 사실 '세나개'도 우리 자신 즉, 인간에 대한 TV프로다. 결국 전국 모든 말썽쟁이 개들을 만든 것은 그 개를 길들인 주인이 원인이었으니 말이다.
인간의 유년기는 다른 포유류 보다 유독 길다. 젖을 먹이고, 부모와 눈맞춤하며, 말과 글을 가르친다. 어디 부모뿐인가? '할머니 효과'를 너머 소문난 선생님과 유치원에 학원까지 찾아간다. 소중한 내 핏줄을 위해 수많은 돈과 시간의 지출도 감수한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It takes a village to raise a child)'란 말이 실감 난다. 이런 장기간의 유년기를 우리 사피엔스만이 가진 고차적 사고능력의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태어나자마자, 심지어 걸을 수도 있는 다른 포유류들과 달리 1년 이상이 지나야 걸을 수 있고, 10년 이상이 되어야 독립적 생활이 가능한 유약한 인간은 (상대적으로) 그 긴 시간 동안 사회를 천천히 받아들이고 내면화한다. 익혀야 할 것도, 배워야 할 것들도 많다. 지표면 위가 아닌 곳에서도 최근에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조상들이 이룩해 놓은 문화와 역사를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인다. 사회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테스트를 받고, 다른 객체와 비교하며 스스로 검증한다. 보이지 않는 목줄을 달고, 바운더리(boundary) 안에서 철저히 길들여지는 것이다.
5억 년 척추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감각을 중심으로 우리는 사회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내면화하여 지각하여 인지하고 인식한다. 우리는 그것을 의식(意識, consciousness)이라고 부른다. 피터스(R.Peters)는 교육의 개념을 사회적 의식(儀式, ritual)으로 설명했는데, 말장난을 부리면 '의식(儀式)을 의식(意識)하는 것이 곧 학습이라고나 할까?
결국, 우리는 철저히 사회 속에서 길들여져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매트릭스의 한 장면처럼 빨간약과 파란 약을 선택하고 사회의 구조를 벗어나 그 실체를 본다는 것은 종교나 철학과 같은 현학적인 질문이지 않을까? 도리어 이런 질문을 '신포도의 비유'처럼 스스로에게 해본다.
사회적 존재로 철저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에서 벗어나 '나'라는 존재(being)를 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렵다는 것으로 자꾸 귀결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로 다시 연결된다. 보리수나무 아래서 오랜 기간의 수행과 사색 끝에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친 싯다르타의 일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범인(凡人)으로써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나라는 '자아(self)'도 타인과 환경과의 접촉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니까. 즉, 이 우주라는 공간에 그리고 지구라는 행성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독고다이로써의 '나'는 존재하기가 어렵다.
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싶어
모두 잠든 후에 나에게 편지를 쓰네
(중략)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계좌의 잔고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신해철-나에게 쓰는 편지 중>
그럼에도 우리는 나를 찾고 싶어 한다. '찾는다'는 것은 잃어버린 또는 잊어버린, 또는 답을 구하고자 할 때 쓴다. 나라는 존재는 애초에 존재했던 것일까?
밤이면 밤마다 자신의 온몸으로 거울을 닦았던 윤동주나 매일 맑은 호수를 찾아 자신을 비추었던 나르시소스처럼 우리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성찰한다는 쪽이 오히려 맞는 해석일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도 결국 나 스스로가 만들어낸 하나의 '상(像)'이라고 한다면 나라는 존재 또한 스스로가 자각하는 순간의 의식으로 드러난 자체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오늘도 '살아버린' 나를 되짚어보다 문득 유튜브에 뜬 노랫말에 이런 생각을 해봤다.
세상이라는 끈적하게 달라붙은 그림자를 떼내지 못한, 결국 여기까지 와버린 나를 보며 푸념 섞인 변명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운명이다. 그것도 우연이 만들어낸 교묘한 운명이다. '
결국 나도 거울을 닦아야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왜곡이 없는 정말 투명하디 투명한 그런 거울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