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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KER Jan 25. 2019

언어의 정원, '지구' <2>

지적 설계론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

사람들에게 지난 수 세기 간 있었던 수많은 과학의 발견 가운데 가장 교회와의 갈등이 심했던 발견 두 가지를 들 라고 하면 대다수가 근대의 지동설과 현대의 진화론을 꼽을 것이다. 이 두 이론이 기독교가 압도적 다수인 유럽에서 형성되어 교회의 전통적 성경 해석에 도전을 가했기 때문에 아마도 당연한 반응이다. 진화론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은 창조 과학, 지적 설계론, 유신 진화론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나 서로 충돌했는데 이 중 지적 설계론과 유신 진화론을 간략히 살펴보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신자의 수에서 개신교 전체와 동방정교회를 압도하는 가톨릭 교회나 개신교의 일부 교단들 은 대체로 유신 진화론의 입장으로 견해가 정리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이런 문제들이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많이 거론되지 않고 있다. 또, 유신 진화론이라는 용어 대신 진화론적 창조론, 진화론적 유신론, 유신론적 진화론 등 여러 다른 용어가 사용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가장 짧은) 유신 진화론 Theistic Evolution으로 지칭하도록 하겠다.


존 휘트콤과 헨리 모리스의 <창세기 대홍수>

1961년에 출간된 존 휘트콤과 헨리 모리스의 <창세기 대홍수(The Genesis Flood)>를 기점으로 보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상당히 대중화되었던 창조 과학은 젊은 지구 창조론과 오래된 지구 창조론으로 분열되면서 점차 게토화 된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창조 과학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접근 방법을 취하는 지적 설계론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먼저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다.


필립 존슨의 <심판대 위의 다윈>

‘지적 설계론’이라는 용어는 1989년에 출간된 <판다와 사람에 관하여>라는 책에 처음 공식적으로 등장하지만, 이 개념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한 책은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 캠퍼스의 법학 교수였던 필립 존슨이 1991년에 쓴 <심판대 위의 다윈>(Darwin on Trial)이다. 이 책은 보수 기독교계의 큰 관심을 끌었고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과학의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문제 삼으며 기존의 창조 과학에 싫증 난 사람들에게 새로운 유형의 창조론을 제시했지만 자연 과학자가 아닌 법학자가 썼다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마이클 베히의 <다윈의 블랙박스>

1996년 이러한 한계를 깨고 지적 설계론을 더욱 널리 알리는 책이 나온다. 리하이대학의 생화학 교수인 마이클 베히가 쓴 <다윈의 블랙박스>(Darwin’s Black Box)가 그것인데, 여기에서 베히는 쥐덫을 예로 들며 그 유명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온다. 이것은 어떤 체계를 이루는 여러 부분 중 하나라도 없어지면 그 체계가 기능하지 못하는 그런 복잡성을 뜻하는데, 베히는 편모와 혈액 응고 등의 복잡성을 설명하면서 이런 복잡성은 진화론으로 설명될 수 없고 ‘지적 설계자’의 개입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윌리엄 뎀스키의 <설계 추론>

뒤이어 1998년에 나온 윌리엄 뎀스키의 <설계 추론>(Design Inference)은 확률 이론과 정보 이론을 통해 지적 설계자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여기에서 뎀스키는, 이 세상에는 자연적 과정으로는 도저히 생길 수 없는 복잡성, 즉 ‘특정화된 복잡성’이 존재하는데, 이런 복잡성은 지적 설계자의 개입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지적 설계론의 등장은 게토화 되어 있던 기존의 창조 과학 운동이 일으키지 못했던 몇 가지 변화를 가져온다. 그중 한 가지가 과학계의 반응이다.


주류 과학계는 ‘지적 설계론’ 이전에 형성됐던 ‘창조 과학’에 대해서는 아예 반응이라고 할 만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925년에 있었던 유명한 ‘스콥스 재판’을 거론하며 예전에도 과학계가 창조 과학에 조직적 대응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당시에는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것과 같은 ‘창조 과학’이 아직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도 않았다. 재판의 주역도 과학자 단체가 아니라 일반 시민 단체인 ‘미국시민자유연맹’이었다.


<스콥스 재판> William Jennings Bryan(seated, left) is being questioned by Clarence Darrow(right).

스콥스 재판’ 이후 36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창조 과학을 형성하고 대중화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존 휘트콤과 헨리 모리스가 쓴 <창세기 대홍수>(The Genesis Flood)가 출간된다. 이 책이 근본주의 교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여러 창조 과학 서클들이 생겨날 때도 과학계는 전반에 걸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부 산발적인 반 응이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무관심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과학계 내부에서 일어난 논쟁, 즉 각 전문 분야의 학술회의나 해당 학술지에서 발표되어 일어난 논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학계 밖에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주장에 그 분야의 전문 과학자들이 심각한 반응을 보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지적 설계론은 (비록 반대하는 반응이기는 하지만) 과학계의 반응을 끌어낸다.


존 브록만의 <지적 사고>

지적 설계론에 관한 과학자들 반응의 한 예가 2006년에 출간된 <지적 사고>(Intelligent Thought) 다. 여기에서 16 명의 세계적 학자들(생물학자, 물리학자, 인류학자, 심리학자, 철학자 등)은 지적 설계론의 주장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비판한다. 비록 이 책이 각자가 쓴 에세이의 모음집 형태로 된 간략한 것이긴 하지만, 그 이전의 창조 과학에 대해서는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해서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던 과학자 집단이 이렇게나마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지적 설계론의 입장에서 하나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리차드 도킨스의 <지상 최대의 쇼>

지적 설계론에 대한 반응은 개별 과학자들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리처드 도킨스는 1976 년에 초판이 출간되어 이제는 고전이 된 ‘이기적 유전자’나 그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확장된 표현형’ 등 도킨스의 초기작들은 생물의 진화를 검증된 과학적 사실로 전제하고 그 진화의 작동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서도 지적 설계론이 나타나 진화론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자 도킨스는 왜 진화가 사실인가 하는 것을 일반인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 글을 쓰기 시작한다. 2009년에 출간된 <지상 최대의 쇼>(The Greatest Show on Earth)가 그 대표적이다.


(왼쪽) 닐 슈빈의 <내 안의 물고기>와 (오른쪽) 마이클 셔머의 <왜 다윈이 중요한가>

그 외에도 2008년에 출간된 해부학자 닐 슈빈의 <내 안의 물고기>(Your Inner Fish), 2006년에 출간된 과학사가 마이클 셔머의 <왜 다윈이 중요한가>(Why Darwin Matters) 등 많은 책이 진화론을 설명하고 지적 설계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나온다. 일반인들이 지난 150년간에 걸쳐 축적된 진화를 뒷받침하는 압도적 증거들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한 과학자들의 대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펜실베이니아주 도버 카운티 교육위원회가 지적 설계론 서적을 교과서로 사용하게 하는 결정을 한 것에 서 촉발된 유명한 ‘도버 카운티 재판’에서도 과학계는 이전의 방관적인 자세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다윈의 블랙박스>의 저자 마이클 베히를 비롯한 8명이 지적 설계론 측의 증인으로 참석하자 과학계에서는 브라운 대학의 생화학 교수인 케네스 밀러 등 7명의 학자가 반대 진영의 증인으로 참여했는데, 이것은 개인주의가 강한 과학계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과학계는 담당 판사인 존 존스 3세가 지적 설계론을 옹호하는 부시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큰 우려를 했지만, 수 주간에 걸친 양측의 열띤 공방이 끝난 후 판사는 무려 139쪽 에 달하는 판결문을 통해 지적 설계론이 창조 과학의 연장선에 있는 종교적 주장일 뿐 과학적 가설이 아니라고 판결한다.


‘도버 재판’이 열리기 몇 달 전인 2005년 5월에 열린 캔자스주의 진화론 청문회에서도 일부 정치인들이 지적 설계론을 공립학교 교과과정에 포함하려고 시도했지만, 과학계는 황당한 주장이라며 반대한다. 결국, 2007년 2월 “지적 설계론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결론과 함께 청문회는 종료된다.


지적 설계론이 가져온 또 한 가지 변화는 지적 설계론이 (그 이전의 창조 과학과는 달리) 직접 성경을 인용하지 않음으로써 기독교적 색채를 가능한 한 드러내지 않고 여러 종파의 유신론자들을 포용하려고 한 점이다. 지적 설계론의 대표 주자 중 한 명이며 <진화의 아이콘>의 저자인 조나단 웰스가 열렬한 통일교 신자인 것이 한 예이다. 이것은 지적 설계론의 외연을 넓혀서 기존의 창조 과학이 게토화한 것과 같은 현상을 막는 데는 어느 정도 이바지했지만 근본주의자들이 지적 설계론을 혼합주의라고 배척하게 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근본주의 그룹에서는 지적 설계론에서 말하는 그 ‘지적 설계자’가 기독교의 하나님인지 이슬람의 알라인지 힌두교의 브라만인지 알 수 없다고 공격했다.


지적 설계론에 대한 신학계 전반의 반응도 별로 호의적이지는 못했다. 지적 설계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금까지의 과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그런 부분이 ‘지적 설계자의 개입’으로 설명된다고 할 때, 어느 날 그 부분을 설명하는 과학적 사실이나 이론이 밝혀지면 지적 설계자의 영역은 자연히 축소되고, 과학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점점 더 신의 활동 범위가 줄어드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지적 설계론에 관한 관심은 최근 들어 많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과학계도 한동안 보였던 반응 외에 특 별한 반응을 보일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과거의 ‘창조 과학’과 마찬가지로 ‘지적 설계론’도 각 과학 분야의 전문 학술회의나 학술지에서 거론되는 과학 방법론으로서가 아니라 동호회 성격의 자기들만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창조 과학을 의심스럽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창조 과학이 계속 자신들의 주장을 정상적인 과학의 통로가 아니라 대중들을 상대로 한 서적이나 강연을 통해서 한다는 점이다. 창조 과학의 주장이 옳다면 생물학뿐만 아니라 천문학과 우주물리학, 해양학, 지질학 등 과학의 전 분야에 그야말로 경천동지 할 혁명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창조 과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과학적 증거들이나 주장을 세계적 학술지나 학술회의에서 발표했다는 얘기는 들을 수가 없다. 결국, 이런 것들을 도저히 정상적인 과학의 방법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아직도 창조 과학 사이트에서 얻은 과학 지식(?)을 가지고 ‘정신 승리’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여전히 한국교회에 남아 있는 창조 과학의 어두운 그림자를 느끼곤 한다.


현대 과학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응을 소개할 때,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을 하나의 연속된 운동으로 보고 한 덩어리로 묶어서 소개하는 때도 있고,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을 따로 언급하는 때도 있다. 이 둘 사이에 분명히 차이점이 있다. (1) 지적 설계론은 성경 해석에 있어 창조 과학처럼 교조적이지 않고 과학 전반에 대해서도 창조 과학보다는 열린 모습을 보여 준다. (2) 비록 과학계의 강력한 반론에 부딪히기는 했지만 마이클 베히나 윌리엄 뎀스키 등 지적 설계론의 접근 방식은 기존의 창조 과학과는 달리 학문적인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창조 과학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과학계가 지적 설계론에는 대응했던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창조 과학과는 다른 접근 방법을 지향하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지적 설계론의 앞날이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결국 다음의 두 가지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첫 번째 길은 가능성이 있을지 의문이고 두 번째 길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는, 지적 설계론이 과학계에서 새로운 방법론으로 인정받는 길이다. 지적 설계론은 자신들의 주장을 과학계 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과학의 ‘방법론적 자연주의’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과학 작업에서 초자연적인 요인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과학계가 설계자를 인정하는 ‘유신론적 과학(결국 기독교적 과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 자연적 원인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깨는 이러한 주장에 대한 비종교인이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학자들도 비판적이다. 우종학 교수는 “자연현상을 자연적 원인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과학의 범주를 정하는 것은 그것이 과학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창조주가 자연계에 개입해서 뭔가 작용을 했다면 그것을 어떻게 과학으로 다룰 수 있을까?”라고 밝힌다.


지적 설계론은 과학의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비판하면서 초자연적인 설계자를 인정하는 과학을 하라고 요구하 지만, 과학이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사용하기 때문에 힌두교 과학자나 불교 과학자나 기독교 과학자가 다 같이 인정하는 과학 작업이 가능한 것이다. ‘기독교적 과학’이 따로 있을 수가 없다. 다른 종교에서 ‘힌두교적 과학’이나 ‘불교 적 과학’을 들고 나온다면 인정할 수 있을까?


두 번째는, 지적 설계론이 과학계와 상관없이 교회에서 대중 홍보를 통해 일종의 기독인 동호회로서 생존하는 길이 있다. 과학을 표방하면서 어떻게 과학계와 상관없이 존속할 수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창조 과학도 실제 과학계와는 별 상관없이 교회에서 생존하고 있다. 심지어 창조 과학을 부정하면 마치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않는 것처럼 몰아가는 교인들도 있다. ‘창조 과학’을 부정하는 것이 ‘창조’를 부정하는 것과 동일시되고 있다. 물론 바람 직하지 않은 일이지만, 지적 설계론도 창조 과학과 유사한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지적 설계론의 선택에 관계없이 창조 과학은 존속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만큼 창조 과학이 근본주의 교인들의 생각에 깊이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창조’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창조 과학’에 대한 신앙이 많은 교인의 생각을 지배하 고 있는 현실에서, 과학계가 아무리 창조 과학의 주장이 틀렸다고 해도 ‘하나님의 진리는 세상에서 미련하게 보이기 마련이지!’ 하는 자기 방어 심리를 쉽게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2017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에 박성진 포항공대 교수의 지명과 후보자가 한국창조과학회 이사를 역임한 창조과학 신봉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외 다수 의혹으로 인해 자진해서 사퇴했다. 논란 가운데 특히 과학자들이 문제 삼은 것은 박 후보자의 종교관이 아니라, 그가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보여주는 반(反) 과학이었다. 양자물리학자인 김상욱 교수(부산대 물리교육과)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창조과학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문제다. 우리는 박성진 교수가 ‘신에 의한 세상의 창조’를 ‘믿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신에 의한 세상의 창조’를 ‘과학’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둘은 어떻게 다른가. 종교의 자유는 개인의 고유한 권리다. 이것은 개인의 양심을 수호하는 문제다. 하지만 특정 종교의 세계관에 ‘과학’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의미가 달라진다. 이러한 계기로 공직자에게 요구되는 종교관과 세계관 또한 예리하게 들춰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서 그 의미가 상당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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