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손가락 튕기기

by 잠전문가

봄이 오고 있다. 봄의 전령사라는 별명답게 매화는 화사한 꽃잎으로 겨울을 힘써 밀어내고 있다. 통통한 목련 봉오리도 순백의 잎을 내기 직전이다. 그런데 잿빛의 쓸쓸한 겨울이 자취를 감추는 이 시기가 누구에게나 반가운 건 아니다. 본인은 아직도 벌거벗은 겨울나무 같은데 내 마음 같던 겨울이 돌연 자취를 감추면 슬퍼지는 이들이 있다. 활짝 핀 꽃이 사람들의 얼굴을 밝히고, 따뜻한 봄볕이 부드럽게 모두를 녹이는데 나만 춥고 스산한 냉동실 구석에서 잊혀져 가는 기분이다.


나 또한 그래본 적이 있다. 따스한 봄바람, 공원, 벚꽃... 세상엔 온통 축포가 터진 것 같은데 오라는 직장도 없고 돈도 없던 나는 누추한 옷과 더 누추한 마음으로 길을 걸었다. 아빠는 무절제한 음주로 두 번의 암 수술을 했는데 두 번 모두 벚꽃이 흩날리고 새 잎이 돋는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나 빼고 모두가 행복하고, 우리 집 빼고 모두가 화목한 것 같았다. 무자비하게 화사한 봄 뒤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초라한 기분을.


인간은 얼마나 취약한가. 내가 이 '취약함'에 대해 생각한 건 작년부터다.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 지독한 무기력을 겪었기 때문이다. 나도 몰랐다. 나는 때에 따라 우울감은 느껴도 우울증은 평생 앓지 않을 줄 알았다. 특별히 큰 문제가 없는데도 사는 의욕이 이렇게 없어질지 몰랐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밝고 긍정적인 사람인 줄 알았으니까. 어리석게도 이제야 인간의 취약함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누구나 한 순간에 취약해질 수 있으며 그걸 타인이 멋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걸 나이 마흔 가까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역치가 다르고, 고통을 느끼는 분야도 다 다르기에 누군가는 작은 돌부리에 걸려도 잃어나지 못하고, 누군가는 절벽에서 떨어져도 조금 아파하곤 벌떡 일어난다. 장애물이 무엇이든 모두 처절한 사투를 벌이며 살아가기에 섣부른 비난은 넣어두는 게 좋다.




혼란한 정치와 이어지는 흉흉한 사건들, 유명인의 돌연한 사망 소식까지 들려오는 와중에도 화사하게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나는 드라마 <조용한 희망>에서 본 손가락 튕기기를 떠올렸다. 주인공은 여성들을 위한 쉼터에서 글쓰기 그룹모임을 진행하는데 글쓰기 주제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여자들은 자신의 글을 용기 내어 읽고, 낭독이 끝나면 모두 엄지와 검지를 튕겨 딱딱딱 소리를 낸다. 저 장면에서 왜 박수를 치지 않고 finger snap을 할까 궁금해 찾아보니, '포에트리 슬램'이라 하여 자유시 낭독 대회 또는 퍼포먼스를 하면 청중이 지지와 공감의 표시로 손가락을 튕기는 문화가 있단다. 어떤 여자는 아빠와 별자리를 관찰하며 걷던 밤을, 또 어떤 여자는 폭력적인 남편과 사는 중에 9개월 된 딸이 자기를 쓰다듬던 순간을 이야기했다. 글이 끝날 때마다 모두가 뭉클한 얼굴로 손가락을 튕기는데, 그 소리가 참 묘했다. 오, 그랬구나. 너 그런 순간이 있었구나. 나도 그런 감정을 알고 있어. 공감하는 듯 위로하는 듯하는 '딱딱' 소리. 박수는 지나치게 호쾌하고, 끄덕임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는 조용하게 경쾌했다. 인물들이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마음속에서 팝콘이 톡톡 터지는 것 같았는데, 요 며칠 외출할 때마다 짚 앞의 꽃들이 조금씩 더 피어난 것을 보면서도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떠올랐다.


스프링 피크. 봄철에 자살률이 급증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봄에 가장 자살률이 높다고 한다. 일조량이 적은 겨울에는 무기력한 상태가 지속되기 쉬운데 봄이 오고 일조량이 늘면 세로토닌 호르몬이 증가해 에너지가 생기고 들뜨기 쉽다. 해가 빨리 뜨는만큼 우리의 생체리듬도 더 앞당겨지는데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혼란을 느끼고 감정기복이 심해진다고 한다. 또한 모든 게 생동하는 활기찬 계절이 오면 갑작스레 불안감을 느끼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한다. 꼭 극단적인 생각까진 아니더라도 아직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봄을 맞으며 가을보다 더 쓸쓸한 기분을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뉴스로 안타까운 소식을 접할 때마다 들이닥치는 봄을 힘들게 마주하고 있을 또 다른 누군가가 떠오른다.


새 잎, 새 계절, 새 학기... 모든 게 활기차게 느껴지지만 봄볕이 너무 눈부셔서, 꽃이 흩날리는 계절이 너무 버거워서 힘든 이가 있다면 그저 손가락을 튕겨주고 싶다. 박수보단 덜 요란하게, 소리 없는 눈빛보단 확실하게. 누구나 준비된 것처럼 봄을 맞진 않는다고. 우리에겐 뜨거운 여름의 능소화도, 가을의 코스모스도, 눈 속에 파묻힌 동백도 있으니 이르게 핀 꽃에 너무 조바심을 내지 말자고. 그리고 꽃이 아니면 또 어떤가. 지저귀는 새 소리, 문을 잡아주는 앞 사람의 작은 친절, 따뜻한 국수 한 그릇, 짧은 인사. 그런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한다. 이렇게 사소한 행복을 나열하며 묵묵히 살아보자고 글을 쓰는 건 또 언제 퍽퍽해질지 모르는 미래의 나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사는 건 언제까지나 소풍일 수만도 없고, 모든 순간이 처절한 사투인 것도 아니니까 그냥 서로에게 손가락을 튕기며 하루하루 지내보자고 말하고 싶다. 봄이 되니까, 경쾌하게 피어나는 꽃들을 보니까 손가락을 튕기고 싶어졌다. 이름 모를 당신을 향해.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냥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