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엄마는 참 좋은 여자야!

잠들기 전, 아들의 고백에 내 마음은 쿵쾅거렸다.

"엄마는 참 좋은 여자야.
엄마는 예쁘고 난 엄마가 제일 좋아.
나 엄마랑 백 년까지 살 수 있어?"


월요일 출근을 앞두고 오늘 낮잠도 패스 한 아들을 빨리 재우기 위해 남편과 함께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아들의 조기 취침이라는 빅픽쳐를 꿈꾸며 낮에 시내로 세 식구가 외출도 다녀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들은 버스에서 10분 정도 눈을 감고 쉼을 청했지만, 기나긴 낮잠은 없었기에 남편과 기대한 우리의 꿈은 조기달성될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함께 누운 지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아들은 꿈나라로 갈 기미가 안 보였다. 엉덩이를 토닥이고 발을 주물러 주고 손을 마사지를 해 줘도 아들은 쉬이 잠에 빠지기 어려운지 계속해서 아빠 엄마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아들의 대화 시도에 맞장구를 쳐 줬지만 그게 오히려 아들의 정신을 각성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제는 대화를 하지 말자고 암묵적으로 합의를 했다. 잠시 잠깐의 침묵이 있었지만 그 침묵을 깬 건 아들이었다. 갑자기 "엄마는 참 좋은 여자야!"라고 말하는 아들의 목소리에 순간 벙-졌다. '내가 잘못 들었나? 지금 나한테 좋은 여자라는 표현을 쓴 게 맞는 건가?' 생각하며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아들은 정확히 '좋은 여자'라는 표현을 썼다. 그 말이 너무 귀여워서 풋-하고 웃음이 나면서도 이토록 나를 좋아하고 사랑해 주는 남자 생명체가 남편 외에 또 한 명 있다는 사실에 너무 감사했다. 아들이 다시 물었다. "나 엄마랑 백 년까지 살 수 있어?"라는 녀석의 귀염 가득한 질문에, 어서 아들을 잠재워야겠다고 강하게 마음먹었던 내 마음은 솜사탕처럼 스르르 녹아내렸다.




"나 엄마랑 결혼할래!"


최근 들어 아들은 가끔씩 내게 이런 말을 건넨다. 어린이집에서 여러 가지 놀이를 통해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을 배우고 '결혼'과 같은 아직은 너무나 머나먼 이야기들에 대해 어렴풋이 배워가는 모양이었다. 어느 누구나 그런 시절을 겪었겠지만, 우리 아들 또한 요즘 녀석에게 최고의 데이트 상대는 엄마이다. 그래서 이따금씩 대화 가운에 후렴구처럼 "엄마랑 결혼할래!"라는 다부진 포부를 과감하게 밝히는 녀석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한다.


"에에? 이걸 어쩌지? 엄마는 이미 아빠와 결혼을 했는 걸! OO이는 새로운 결혼상대를 찾아야 할 것 같은데? 미안해!"라는 내 말에 아들은 실망 가득한 표정이 역력하다. 심지어 가끔은 "왜 엄마는 아빠랑 먼저 결혼을 했어?!"라며 심하게 화를 내기도 한다. 내 눈에는 그런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있는 힘껏 깔깔거리며 웃는 나인데, 우리 아들은 아주 심각할 뿐이다. 화가 잔뜩난 녀석의 눈은 엄마를 흘겨보느라 이미 흰자위가 가득하다. 그러나 나는 너무 행복하다. 이토록 나에 대한 편견 없이 순수한 사랑을 가진 생명체가 우리 아들 말고 또 있을까 싶다.




내가 생각할 때 아들을 대하는 내 모습은 대부분 온화한 엄마이다. 나는 아들을 대할 때 최대한 나의 주관적인 감정상태를 배제하기 위해 애쓰는 편이다. 화가 밀려오려고 할 때에도 우선 숨을 한번 들이쉬고 나만의 생각을 꼴깍 삼켜본다. 그리고 나를 화나게 한 행동이 진짜 아들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나의 인내심이 부족한 것인지를 찰나의 순간에 알아채려 노력한다. 웬만해서는 아들과 대화할 때 딴짓을 안 하고 아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아들의 숨겨진 감정까지 읽으려 노력한다.


아들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며 엄마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아들의 말을 가로채지 않고 끝까지 들어준 뒤 내 생각을 분명하게 전하는 편이다. 내가 쓰는 단어가 생소해서 뜻을 모를 때마다 아들은 “엄마, 제한이라는 말이 뭐야?”처럼 곧바로 질문을 하는데 그것에 대해 귀찮아하지 않고 항상 쉽게 말해주려고 노력한다. “제한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야 OO이가 이해할까? 음, 이건 되고 이건 안 되는 식으로 모든 행동이 허락되지 않을 때가 적절하겠다!” 그러면 아들은 그제서야 온전히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들이 잘못을 하더라도 최대한 핀잔을 주지 않고, 어린이집의 친구들과 절대 비교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또한 내가 잘못을 한 상황에서는 빠르게 아들에게 사과하는 편이다. ‘내가 부모인데, 너보다 내가 더 어른인데..’ 라는 편협한 생각을 버리고 아들을 통해 내가 배우는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잘못된 것은 빠르게 인정한다. 나는 아들을 소유물로 여기지 않고 나와 동등한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나는 아들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긴다. 나는 그런 나의 생각이 아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일까, 아들에게 나는 좋은 엄마이자 좋은 여자이다. 아들이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이 너무나 고맙다. 그러나 사실 나도 사람인지라 정말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지만 아들에게 큰소리를 내는 순간도 있다. 그런 때가 언제인지 곱씹어 보면 대부분 나의 심신이 완전히 지쳐있는 번아웃 상태일 때가 대부분이다. 번아웃 상태가 되면 내 스스로 정신을 컨트롤 하기가 상당히 힘이 든다. 감정에 지나치게 솔직해지고 그것이 결국 독의 화살로 내게 돌아온다. 그 순간만큼은 아들에게 정서적 지지가 아닌 정서적 상처를 주게 되기도 한다.




어떤 엄마가 나쁜 엄마일까? 아마 길을 지나가는 열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아이를 때리는 엄마, 화를 내는 엄마'라는 답을 하지 않을까. 하지만 행동심리학 측면에서 나쁜 엄마는 '우울한 엄마'라고 한다. 육아에 있어서 때리고 화내는 엄마보다 우울한 엄마가 더 나쁘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우울한 엄마에게 아이는 정서적 지지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정서적 지지는커녕 우울한 엄마는 아이를 방치하게 되고 그것이 오랜 시간 지속된다면 결국 아이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학대받는 아이가 된다. 우울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대부분의 우울은 심신의 번아웃에서 오는 것 같다. 번아웃을 겪어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우울의 모습을 잠깐이라도 마주쳤을 것이다.


육아를 하면서 가장 많은 고민은 아이에게 스마트 폰과 같은 영상매체를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나와 남편은 육아 초기에부터 이 부분에 대해 함께 고민했고, 결코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외출을 할 때에도, 외식을 할 때에도 아이의 손에 단 한 번도 스마트폰을 쥐어준 적이 없다. 꼭 영상을 노출을 해야 한다면 집에서 TV로만 시간을 정해서 노출을 했다. (사실 이것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부의 교육관이나 가치관에 따라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외식을 할 때에도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면서 식사를 하다 보니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쇼핑을 할 때에도 유모차에 앉은 아들이 갑갑해하면 남편과 번갈아가며 새로운 관심사를 가지고 아들을 달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었다. 가끔씩 다른 부모들이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쥐어주고 우아하게 식사를 하며 부부만의 대화를 한다거나, 편하게 쇼핑을 하는 모습을 볼 때면 갈등을 하게 되는 일도 빈번했다. 하지만 우리가 세운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리고 아이가 스마트폰에 대해 관심을 갖는 돌 무렵 즈음을 잘 넘기면 괜찮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들에 대한 믿음은 정말 효과로 나타났다. 어느 순간 스마트폰에 대한 관심의 고비를 넘기니 아이는 스마트폰에 큰 흥미를 갖지 않았다. 심지어 아들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아들과 함께 할 때 핸드폰을 하는 일이 거의 없다. 급한 일 빼고는 옆에 두지 않지를 않아 그런가, 아들도 내가 핸드폰을 꺼내면 사진을 찍기 위함일거라 쉬이 예상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옆 테이블에서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고 있는 아이를 유심히 바라보며 부러움의 눈빛을 보낸 적도 있는 아들 녀석이지만, 점차 커질수록 부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것이 가능한 순간이 왔다. 올해 초에도 세 식구가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2시간가량 코스요리를 먹은 적이 있다. 다섯 살 아들과 함께 이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사실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면 조금은 부끄럽지만 남편과 교대로 식사를 이어갈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아들과 함께 세 식구가 이야기 꽃을 피우며 음식의 맛과 향을 느끼며 식사를 마치고 났을 때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진짜로 흘리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심히 감동했다.)




'번아웃이 느껴질 때
스마트폰을 보여주는 것이 더 낫다.'


다시 번아웃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아이를 대함에 있어 번아웃이 얼마나 최악인지 알 수가 있다. 스마트폰을 보여주는 것에 대해 스스로 자책감을 느끼는 부모들도 있겠지만, 사실 부모의 번아웃 상태를 아이가 오롯이 겪는 것보다 영상매체를 잠시 활용하는 게 나을 만큼 번아웃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다.


내가 코로나 확진을 받았던 그 날, 나는 생활치료센터로 이송되고 남편과 아들은 단 둘이 집에 남아 14일간의 자가격리를 시작했다. 이미 1년 간의 육아휴직으로 아들과 오롯이 함께 하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남편이었지만,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아들과 단 둘이만 함께 하는 것은 굉장히 새로운 고난이도의 미션이었을 거다. 돌아서면 밥, 돌아서면 밥인 상황과 아침부터 아들이 밤잠에 들 때까지 제한된 공간과 제한된 놀잇감으로 놀아야 하는 것도 전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 그래서일까, 남편은 결국 자가격리 일주일 만에 고열이라는 발열과 함께 또 한 번의 코로나 검사를 해야만 했다.


그때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OO이에게 너무 최선을 다하지 마. 우선 여보가 살고 봐야지. 하루 종일 TV 보여준다고 OO이가 TV죽돌이가 되는 건 아닐 거야.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여보의 심신 회복을 위해 애쓰라고!"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사실 남편은 자가격리 일주일 동안 평소처럼 아침/저녁 30분만 TV를 보여주고 그 외에 시간은 온 힘을 다해 아들과 놀아주었다. 그 결과로 남편에게 심신의 번아웃이 왔고, 코로나로 엄마를 한차례 뺏긴 녀석에게 아빠도 코로나 확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선물해 줬다. 물론 남편의 발열이 단순 몸살감기로 판명 나면서 또 한 번의 고비는 넘겼지만 그 후 남편의 태도는 상당히 달라졌다.


자가격리 초반에는 '엄마가 떠난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내가 온몸을 불태워서 아들에게 온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남은 자가격리 일주일을 아들과 함께 무사히 마치고, 자가격리 마지막 날 무사히 이사까지 마치는 것이 내 목표이다.'라고 생각을 바꾼 남편이었다. 남편의 발열 소식에 아들의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께서도 "아버님, TV 좀 많이 보여준다고 세상이 두 쪽 나는 것은 아니에요. 아버님과 OO이 건강이 최우선입니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번아웃만큼 아이에게 나쁜 것이 없음은 분명한 일일 것이다.




어쨌든 오늘 나는 잠들기 전 아들의 한 마디에 다시금 다짐을 한다. 앞으로도 아들을 대함에 있어서, 아니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더 나아가 내 삶에 있어서 번아웃 그놈을 가장 조심하겠다고 말이다. 지금처럼 나만의 확고한 가치관으로 아들에게 더 좋은 엄마, 좋은 여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아들이 언젠가는 나보다 더 좋아하고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생길지라도 질투하기 않고 아들을 정서적으로 잘 분리시킬 수 있게 마음을 단단히 다지는 엄마가 되어야겠다. 오늘도 내 마음씨앗은 아들이 주는 정서적 감동에 쑥쑥 한 뼘 더 자라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다리가 조금 더 길었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