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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씨 Jun 14. 2023

마녀의 정원

0. 프롤로그

  새벽 1시 45분. 충동적으로 나온 여자는 갈 곳이 없었다. 새벽의 공기는 낮게 깔렸고 불안정한 여자를 감싸줄 만큼 따뜻하지 못했다. 여자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제일 먼저 떠나간 남자를 생각했고 그다음 근무태만으로 자신을 해고시킨 직장을 떠올렸다. 쉽게 잠들 수 없는 밤을 술로 재웠다. 여자는 망가졌고 마침내 자신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렸다. 이내 곧 헛웃음을 터트렸다. '손목을 그으려면 커터칼이 나을까? 식칼이 나을까? 녹이 슨 커터칼로 긁다가 파상풍에 걸리지는 않을까'하는 시답잖은 생각 때문이었다. 


  아파트 전세에서 해가 들지 않는 단칸방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액정 너머의 파란색 그래프가 너울성 파도처럼 요동칠 때마다 여자의 숨 쉬는 공간이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너도 나도 하니까 호기심에 십만 원을 투자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가서 보니 20%가 뛰었다. 조금 더 넣을걸, 하는 아쉬움이 자리 잡았고 그날 밤은 여자가 적금을 해지하기에 충분했다. 점점 불어나는 돈은 마치 사이버머니 같았다. 여자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남자의 모아둔 돈마저 투자금으로 사용했다. 3개월을 코인에 절여 살던 여자에게 악몽이 찾아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고 일어나 확인을 했더니 마이너스 70%를 찍고 있던 것이다. 여자가 보고 있는 와중에 계속 떨어졌다. 끝내 다시 오를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여자가 투자했던 코인은 상폐를 했다. 처음에는 대출을 받아다 투자했고 그다음은 아파트 전세를 빼다가 투자했다. 모든 사실이 탄로 난 여자에게 남자는 소리쳤지만 여자는 코인어플조차 삭제하지 못했다. 남자의 원금만이라도 돌려주고 싶었던 여자에게 남은 건 사금융대출뿐이었다.


  우울한 현실은 무거운 무기력이 되어 여자를 짓눌렀다. 아무도 없는 거리는 마치 세상에 자신 홀로 남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한 마디로 인생 망했다는 생각이 들자 코 끝이 시리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거칠게 눈물을 닦으면서도 집으로는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시 한 걸음 내딛으려는 찰나 여자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곳은 조명이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주점이었다. 담쟁이덩굴의 초록과 붉은 현관문이 대조적이었다. 마치 옛날 동화책 삽화에서 자주 보였던 숲 속의 오두막처럼 생기기도 했고 한 때의 꿈처럼 남은 네덜란드 니메겐을 여행할 때 묵었던 에어비앤비 같았다. 조용한 재즈가 흘러나왔고 식기 부딪히는 소리와 따뜻하고 맛있는 냄새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깥의 공기와 다른 포근한 온도에 저절로 마음이 놓였다. 여기저기 술병이 줄지어 있다. 술병의 낡은 라벨들이 눈에 띈다. 의외로 먼지가 쌓이지 않았고 모두 빈 병도 아니었다. 구석에는 한 때 양초였던 것들이 작은 산을 이루어 독특한 장식품 역할을 하고 있다. 한 켠에 줄지어진 푸릇한 화분의 생동감은 죽음을 생각했던 여자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갔다. 크게 한 숨을 뱉었더니 어쩐지 개운했다. 여자는 분주한 주방이 보이는 카운터바에 앉았다. 

  여자가 앉자 영지가 앞치마에 손을 슥슥 닦으며 주방에서 나왔다. 


 "어서 오세요. 요리가 이제 막 완성되었어요."


 "저, 주문 아직......"


 "아 맞다! 칵테일 먼저 드릴게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 영지는 어딘가 정신없어 보인다. 영지가 내온 칵테일은 영롱한 붉은빛과 오렌지빛이 감미롭게 엉켜있었다. 


  "해가 뜨는 모습을 닮은 칵테일, 테킬라선라이즈에요. 저희 가게에선 조금 특별한 재료가 더 들어가는데 이게 비밀......카모마일......"


  영지는 공기를 채운 볼을 검지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듯하다. 아마 비밀 재료가 카모마일의 침이라는 것을 말해야 하는지 고민 중인듯하다.


  "매니저! 음식 가져가!"

  "아차차! 잠시만요."

  안쪽에서 짜증스러운 외침이 들렸다. 영지의 허둥거림에 여자는 작게 웃음이 나왔다. 테킬라선라이즈를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하고 달달한 오렌지주스와 비슷했다. 그리고 꽃향기가 살짝 느껴졌다.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주방에서는 여전히 두 사람의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에게는 그리운 일상의 소란스러움이었다.


  "우에보스 란체로스입니다. 멕시코의 대표적인 아침식사인데요. 지금은 새벽이지만. 하하핫. 부담 없이 즐기실 수 있을 거예요."


  영지는 머쓱하게 웃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여자는 가만히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가볍게 구운 토르티야 위에 잘게 썬 토마토와 강낭콩, 푸른 어린잎과 아보카도들이 먹음직스럽다. 화룡점정으로 계란프라이의 쨍한 노른자까지. 여자는 포크로 계란 노른자를 터트렸다. 흘러내린 모양새를 보니 허기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허겁지겁 음식을 해치웠다. 그리고 남은 칵테일을 음료수마냥 벌컥벌컥 들이켰다. 

  포만감이 잔잔히 차오르고 있었다. 비워진 그릇들을 보자 여자는 왈칵 눈물이 났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잃을 때까지는 독불장군처럼 앞으로 걸어 나가기만 했는데 다시 시작할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왜 한 발도 떼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렸을까. 여자의 내면에 묻혔던 작은 삶의 욕망이 꿈틀 했다.


  "머리가 좀 개운하지?"

 

  카렌은 똑바로 서서 팔짱을 끼고 여자를 내려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카렌이 키우는 카모마일의 신비한 능력이었다. 정신의 안정과 치유나 행복이 필요하면 이만한 식물이 없다. 카모마일은 온화한 성격을 지녔지만 기분이 나쁘거나 불쾌하면 투명한 액체를 뿜는데 그것이 꼭 침을 뱉는 것 같다. 영지는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새삼 마녀의 식물이라는 것을 다시 느끼곤 한다.


  "너희 인간들은 나약한 주제에 죽음을 너무 입에 달고 사는 거 아니야? 사실 그러고 싶지도 않으면서 말야."


  카렌은 단정한 이목구비를 가졌지만 그와 반대로 불량한 혓바닥을 지녔다. 눈보다 새하얀 머리칼을 거칠게 헝클면서 말했다. 여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자신에게 모진 소리를 하고 있는 카렌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지금 이 공간, 너의 꿈이잖아."


  카렌의 말에 여자는 다시 주변을 훑어보았다. 발걸음을 이끌던 낯설지 않은 외관, 내부에서 느꼈던 포근함 그리고 그리운 일상의 소란스러움. 여자에게는 언젠가부터 꿈꾸었던 작은 꿈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말에 휘둘려 요리를 취미로만 남겨뒀어야 했다. 그러던 중 네덜란드 여행하던 중에 우연히 들어갔던 곳이 너무 마음에 남았던 것이다. 가정집처럼 꾸밈없는 내부인테리어와 호탕한 성격을 가진 사장님, 투박한 플레이팅이지만 맛있었던 음식. 돈을 좇지 않고 꿈을 좇게 되면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현실을 버거워하지 않고 어깨동무하며 천천히 걸어가면 가지게 되지 않을까. 여자는 늘 그려왔다.


  "당장은 힘들겠지. 현실은 원래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더 힘들어. 일단 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해. 그리고 정리해. 더러워진 집이든 복잡한 머릿속이든. 그다음에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그다음에 해야 할 것을 하면 돼. 천천히 해. 아무도 너한테 뭐라 안해."

  

  어느새 눈물을 그친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갈 길이 멀겠지만 포기하는 건 너무 아쉬워요." 


  영지가 웃으며 파이팅을 하고 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여자의 입술이 달싹였다.

  

  "저 얼마......"

  

  "아, 그냥 가셔도 됩니다. 저희는 이미 받았어요."

  

  여자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영지는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다음에는 그냥 손님으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여자는 등이 떠밀리듯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해 안 되는 구석이 있지만 기분은 꽤 상쾌했다. 


  여자가 떠난 뒤 카렌과 영지는 바뀐 내부 여기저기를 관찰했다. 여자가 그려온 이국적이고 오래된 펍의 모습이 유지되고 있었다. 여기저기 아무렇게 놓인 장식품은 하나의 인테리어가 되었고 한 곳에다 모아둔 식물들은 불규칙하지만 아름다운 공간을 가졌으며 은은하게 발광하는 주황색 조명이 퍽 어우러졌다. 


  "카렌님 어때요? 지난번 공사장 인테리어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우리 느낌과도 잘 어울리지 않아요?"


  "그러게. 소박하지만 정겨워."


  손님이 아닌 이들에게 그들은 오래된 꿈이나 빛바랜 추억 따위를 값으로 받는다. 보이지도 않고 어루만질 수도 없는, 실재하지 않지만 실제하는 모든 것에는 충분한 가치가 있기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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