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씨 Jun 16. 2023

이제 나랑 바꾸자

나의 반려묘에게

  나와 고양이가 함께 산 지 벌써 11년의 시간이 흘렀다. 고양이를 처음 만난 것은 유기묘보호소였다. 한쪽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던, 결막염이 방치돼 안쪽 눈꺼풀이 살짝 내려앉은 아이였다. 보호소 직원이 아이들 간식을 나눠줄 때도 홀로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새하얀 아이였다. 처음부터 마음을 뺏긴 것은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이 더 눈에 들어왔고 좀 더 어린, 새끼 고양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연이었던 셈인지, 정신 차리고 보니 내 집에 하얀 고양이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함께 살면서 조용하면 조용한 고양이었고 시끄럽다 하면 시끄러운 고양이었다. 어느 날은 퇴근을 하고 집에 가면 '야옹'하며 뛰어왔고, 어느 날은 침대 한가운데에서 자다 깬 얼굴로 날 반기기도 했다. 1박 2일로 여행을 다녀온 날이면 쉬지 않고 야옹야옹옹 잔소리를 해댄다. 저를 두고 다른 방에 가도 야옹야옹 잔소리를 하며 따라온다. 그런데 저는 나를 두고 잘도 돌아다닌다. 화장실 문 닫고 볼일 보면 애처롭게 운다. 덕분에 화장실 문은 늘 열려있다. 샤워를 하면 밖에서 얌전히 기다릴 줄도 안다. 어쩌다 물이 튀면 바로 도망가지만. 내가 밥을 먹을 때면 식탁 위로 올라와 조용히 식빵을 굽고 있기도 하고 저도 사료를 먹기도 한다. 소파에 앉아있으면 내 허벅지 옆으로 엉덩이를 슬쩍 붙여놓고 잠을 자기도 한다. 한 번은 주방 서랍에서 간식을 꺼내준 적이 있는데 그 후로 내가 주방만 가면 저 간식 줄까 설레어 '야옹~'하며 다가오기도 한다. 그리고 간식을 주라고 주방에서 야옹야옹하기도 한다. 잠을 잘 땐 항상 같이 잔다. 머리맡에서 잤다가 발 밑에서 잤다가 바닥에서 잔다. 그러나 항상 내 근방에 있긴 하다.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면 어느새 또 옆으로 와 있다. 연차를 쓰는 날에도 늦잠을 잘 수 없다. 새벽부터 고양이가 깨우기 때문이다. 귀신같이 주말은 알고 같이 늦잠을 자기도 한다. 내가 가는 곳은 늘 따라다녔고 고양이가 머무는 자리에는 늘 하얀 털이 가득했다.

 

  고양이 주제에 호불호가 심하다. 츄르, 파우치, 기호성이 좋다는 습식캔 모두 시도해 보았지만 먹지 않는다. 오로지 그리니즈 참치맛과 참치저키만 먹는다. 그 외 삶은 닭가슴살이나 우유를 먹기도 한다. 고기를 구워도 초밥을 먹어도 사람 먹는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지만 후라이드 치킨은 정신 못 차리기도 한다. 양념 치킨은 또 쳐다도 안 본다. 어처구니없이 사람도 가린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에게 오히려 친절할 정도로 동생을 싫어한다. 이름만 불러도 으르렁거리며 쓰다듬어주려고 손을 뻗으면 경고를 한다. 동생은 그래도 꿋꿋하다. 솜방망이로 5대 정도 맞고 나야 물러선다. 

  

  그런데 우리가 11년 동안 대화를 했으면 너도 이제 한국말을 할 때 되지 않았을까. 흰털만 폴폴 날리지 말고, 파란 두 눈으로 빤히 쳐다보지만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할 때 되지 않았니. 아직 너에 대해 모르는 것도 많다. 언제 태어났는지. 유기묘인지 길냥이였는지. 보호소에는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어쩌다 간식은 입에도 안 대는지. 지금 부족한 것은 없는지. 내가 너에게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 또 어디가 아프진 않는지. 나는 그저 추정만 하고 있잖아.


  고양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해가 바뀔수록 점점 자는 시간이 많아졌다. 예전만큼 노는데 힘을 쏟아붓지도 않는다. 털은 푸석해지고 더 많이 빠진다. 매해 어딘가 아프기도 하다. 5년 전에는 고관절 수술을 하면서 이빨 발치를 했고 2년 전부터 신장 관리를 해주고 있다. 그리고 올해는 기관지가 부어있어 기침과 쌔액거리는 숨소리가 난다. 몸무게는 2.7kg으로 찌지도 빠지지도 않는다. 나는 무럭무럭 찌고 있는데 말이다.

  

  언젠가부터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래봤자 집 안에 숨은 것이겠지만. 또 어딘가에서 태평하게 낮잠이나 자고 있겠지만.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부쩍 가만히 자고 있는 고양이를 보는 일이 많아졌다. 왜 고양이의 시간과 사람 시간은 다를까. 이제 네가 사람을 하고 내가 고양이를 하면 안 될까. 날이 좋으면 바깥으로 나가 한낮의 햇살 아래에서 낮잠도 자고 맛없는 사료 말고 너의 취향인 음식을 찾아가는 맛투어도 해. 한가롭게 나비나 좇으며, 제일 맛있는 풀이 뭔지 뜯어먹어보고 그러다 아프면 병원 가서 제때제때 치료도 받아. 사각형 집에 갇혀있지 말고 산도 보고 바다도 보고 살랑 부는 바람도 맞아봐. 지치면 어디 가서 발 마사지도 받고 너의 영역을 더 크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보다 오래 살아서 병상에 누워있는 나에게 여행 다녀온 이야기도 해주고 너의 취향도 말해주었으면 행복하겠다. 그러니까 이제 나랑 바꾸자. 내 남은 시간만큼 더 살아보자.

작가의 이전글 마녀의 정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