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리스 May 24. 2024

직장인의 마음(2)

2. 재채기와 기침



여름이 왔다.

여름의 통근 지하철은 지옥 중에서도 가장 참기 힘든 지옥이다.


이상기온 현상이 며칠 째 계속되고 있었다.

동시에 내 코도 예민해졌다. 아니, 솔직하게는 타인의 체취가 진해지고 강해졌다는 표현이 맞겠다.


옆에 앉은, 앞에 선 사람의 땀 냄새, 향수 냄새, 숨 냄새, 술 냄새, 음식 냄새의 강도가 심해졌다.

지난주부터는 서늘한 아침 기온에도 에어컨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에어컨은 꺼져있다가 특정 역에서 정차함과 동시에 켜졌다. 나는 그 역에 다다르면 황급히 미리 챙겨 온 카디건을 껴입었다. 준비 없이 찬 바람을 맞은 사람들은 곳곳에서 에이취 에이취 재채기를 해댔다. 나는 은근한 우월감을 느끼며 카디건 안의 온기를 즐기며 며칠을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옆에 앉은 아저씨가 문제였다. 입도 막지 않고 콧물 섞인 침을 튀기며 재채기를 했다. 그것도 연달아 다섯 번. 한번 할 때마다 세 번씩. 그러니까 총 열다섯 번이다. 무려 열다섯 번!!!!

그의 재채기가 열 번째 정도 되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어머! 하고 소리를 질렀다. 평소 남에게 싫은 내색은커녕 참고 말지 주의였던 나였으니, 아마도 본능적인 반응이었으리라. 하지만 아저씨는 미안하다는 사과도 없이 연신 손등으로 콧물을 훔치다 자리를 떠버렸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앞에 앉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그런 나와 아저씨를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불쾌한 감정을 공감받지 못했다는 억울함과 분노 등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어쩌랴. 출근은 해야 하고 일은 해야 하니 씩씩대다가 잊어버리고 있던 또 다른 어느 날이었다.  



아침부터 으슬으슬했다.

긴 팔에 긴 카디건, 얇은 스카프까지 칭칭 감았지만 한기가 뼛속 깊이 돌았다.

감기였다.

부지런히 약을 챙겨 먹고 늘 그렇듯 7시 52분에 진입하는 지하철을 탔다.

문제는 에어컨이 켜지기 시작하는 그 역에서 시작됐다.

찬 에어컨 바람이 콧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참을 수 없는 기침이 터졌다.

콜록콜록콜록

아무리 침을 삼켜도 기침은 잦아들지 않았다.

다음 환승역에 도착하자 어마어마한 인파가 지하철 안으로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공기가 탁해지고 먼지가 일었다.

기침이 더 심해졌다.

  

콜록콜록콜록.

어깨를 들썩이며 입을 막자 옆에 앉아있던 사람이 황급히 일어나 자리를 떴다.

나는 민망하고 당황스러워 뭐라도 해야 했다. 무릎 위에 얹어놓았던 가방을 뒤졌다. 늘 갖고 다니던 마스크는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콜로콜록콜록.

열차 안의 모든 사람이 나를 주시하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열차에 내려 물이라도 사 먹고 다시 탈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영락없이 지각이지 싶었다. 안 그래도 예민한 시기에 지각이라도 한다면 며칠간은 상사 눈치를 각오해야 했다.

조금 뻔뻔해지지 뭐. 하지만 마음은 쉽지 않았다.

몰려오는 기침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양 뺨으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다시 한번 가방을 뒤졌다.

마스크 대신 차가운 비닐감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뽀로로가 그려진 어린이 비타민이었다. 급하게 까서 입에 물었다. 목을 간질이던 느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매일 퇴근하는 엄마 가방을 뒤져 보물찾기 하던 딸아이가 넣어놓은 것이었다. 7살 딸의 실수가 43살의 엄마 목숨을 살렸네!


기침은 목적지를 다섯 정거장 앞두고서야 그쳤다.

그때 익숙한 남자가 내 앞에 섰다.

며칠 전 옆에 앉아 연신 몸을 들썩이던 기침 아저씨였다.

그때 엄청 민망하셨죠? 제가 오늘 그랬거든요.

혹시 그때 황급히 자리를 뜬 건 '어머'하고 소리를 지른 저 때문이었나요?


다음부터 지하철 안에서 심하게 기침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쳐다보거나 불편함을 내색하지 말아야지. 나보다 더 당황스러운 건 멈추지 못하는 기침과 그럼에도 내리지 못하고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 본인일 테니까.

  







"누구나 아마 어떤 면에서는 장애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 자유주의 사회를 형성하고자 할 때, 삶이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by 너스바움




재채기와 기침이 장애는 아니지만

타인이 싫어지는 통근길 지하철에서 되새겨 볼 말.

나도 그 아저씨도 불완전한 존재. 그러니 너무 탓하지 말기.

매거진의 이전글 직장인의 마음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