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화 : 관찰자의 종말
이틀 뒤 오전, 박서연이 탕비실에서 지수 옆에 서서는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창밖을 보며 그녀가 꺼낸 말은.
"지수 씨, 오 과장님 장례식 다녀왔어요? 저도 가고 싶었는데 갑자기 이사님이 급하게 부르셔서. 정말 안타깝죠. 이런 분들은 원래 좀 여리셨잖아요. 너무 예민하게 사신 것 같아서."
여리다고? 예민하다고?
지수는 커피를 받아 들고 돌아서며 박서연의 얼굴을 정면으로 봤다. 박서연은 옅게 웃고 있었다. 진심 어린 슬픔처럼 보이도록 설계된 표정이다. 지수는 그 얼굴을 0.3초 동안 읽으며 장량을 떠올렸다.
초한지의 책사 장량은 늘 눈앞의 현상보다 그 이면의 실리를 살폈다.
‘적의 말이 아니라 적의 이익을 보라.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가 아니라, 그 말이 누구를 이롭게 하는지를 보라.’
오윤아를 '여리고 예민한 사람'으로 프레임화 시키는 것. 그것은 그녀의 죽음을 개인의 취약함으로 귀결시키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이렇게 하면 그녀의 선택을 만든, 근본 원인이었던 조직의 책임은 사라지고 '여리고' '연약한' 오윤아만 남는다. 아무도 잘못한 것 없어. 그저 그 직원이 유별났을 뿐이야.
지수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박서연의 웃음이 0.1초 멈췄다가 다시 돌아왔다.
"응? 무슨 말이에요?"
"오윤아 과장님이 여리거나 예민한 분이 아니었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지수는 커피를 들고 걸어나오며 덧붙였다.
"1년 치 기록을 남긴 사람이 여린 사람은 아니거든요."
탕비실을 나오는 순간 지수는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았다. 관찰자는 발언하지 않는다. 지수가 5년간 지켜온 원칙은 이제 이 시간부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후회가 되지 않았다. 뒤에서 불안할 정도로 흔들리는 박서연의 눈빛이 따갑게 느껴졌지만 각오했던 일이다.
지수는 자리에 앉아 서랍을 열었다. 오윤아의 노트가 들어 있었다. 표지를 한 번 보고서는 그 아래 깔린 군주론을 꺼냈다. 평소에는 밑줄 쳐둔 구절을 확인하는 식으로 읽었지만, 오늘은 처음부터 펼쳤다.
제15장 첫 줄.
'군주가 자리를 지키려면 착하지 않게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상황에 따라 그 방법을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지수는 그 문장을 오래 들여다봤다. 지금껏 이 구절을 타인의 행동을 설명하는 분석의 대상으로만 읽어왔지만 오늘부터는 달랐다. 이 문장이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쓰인 것처럼 읽혔다.
지수는 지금껏 조직에서 관찰자로 사는 것이 현명함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오윤아의 노트를 읽은 지금,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현명함과 비겁함은 때로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지수는 자신이 그 두 가지를 혼동해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군주론을 읽을수록 선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니다. 설계된 것이다. 누군가 의도하고 실행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설계 안에서 강태준 팀장은 방패였고 박서연은 칼이었으며, 회사라는 시스템은 그 모든 것을 적절하게 이용되어졌다.
지수는 오윤아 노트의 마지막 장을 넘겨 봤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 빈 페이지 앞에서 지수는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현실 원칙 #3 분노는 감정이 아니라 정보다
무언가에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그곳에 당신이 지금껏 외면해온 진실이 있다는 신호다. 분노를 느낄 때 그것을 억누르거나 쏟아내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가. 그 분노는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자만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 분노는 때로 그 현실을 처음으로 똑바로 보게 만드는 유일한 계기가 된다. 문제는 분노 그 자체가 아니라, 분노를 어떻게 다루느냐다. 불로 싸우면 재만 남는다. 불을 에너지로 바꿀 때, 비로소 전략이 된다.
다음 날도 지수는 오윤아의 노트를 들여다봤다.
이번에는 처음과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첫 번째 독서가 감정의 소용돌이를 따라가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는 철저한 해체였다. 지수는 노트북을 켜고 엑셀 시트를 만들었다.
세로축에는 날짜, 가로축에는 등장인물을 배치했다. 오윤아, 박서연, 강태준 팀장, 이혜원 이사.
지수는 삼국지를 읽으며 서사의 표면이 아니라 구조를 읽는 법을 배웠다. 조조가 어떤 인물을 언제 등용했는지 유비가 어떤 순서로 세력을 확장했는지, 누가 누구와 동시에 움직였는지를 그림을 그리고 메모를 했다.
오윤아의 노트도 마찬가지였다. 표면만 읽으면 한 직장인의 일기지만, 엑셀로 데이터화하자 전혀 다른 내용들이 드러났다. 패턴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정교하고 잔인한 패턴과 구조였다.
첫째, 오윤아의 기획이나 리서치가 팀 내에서 호평을 받으며 가시화되는 시점.
둘째, 그로부터 48시간에서 72시간 사이, 박서연 차장이 팀장 혹은 이사에게 '개별 보고'나 '별도 티타임'을 갖는 접촉 시점.
셋째, 그 접촉 이후, 공식 회의나 최종 결과물에서 오윤아의 기여도가 희미해지거나 아예 이름이 빠지는 시점.
이 구조는 정확히 세 번 반복되었다. 봄 시즌 캠페인, 하반기 데이터 분석, 그리고 결정적이었던 '어텀 로즈' 론칭 콘셉트. 세 번이 반복되면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계획된 설계다.
박서연만의 계획이었을까. 아니다. 만약 박서연이 단독으로 움직였다면 오윤아가 팀장에게 이의를 제기했을 때 바로잡혔어야 했다. 하지만 강태준 팀장은 매번 무마했다. "팀 작업이라 개인 이름을 넣기 어렵다", "비슷한 생각이었을 거다"라는 말로 방어막을 쳤다.
누구를 위한 방어막인가? 지수는 엑셀 파일을 닫고 사내 시스템의 결재선을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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