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화 : 사면초가의 밤
승진 발표일은 엄숙함과 비장함이 공존하는 날이다.
인사팀이 사내 게시판에 공지를 올리는 시각은 예외 없이 오전 10시 정각. 9시 50분이 넘어가면 사무실 전체에는 기묘하고도 불쾌한 고요가 습기처럼 내려앉는다. 타닥거리던 키보드 소리가 잦아들고 복도를 오가던 발걸음 소리도 사라진다. 사람들은 모니터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면서도 곁눈질로는 옆자리 동료의 미세한 떨림을 읽어낸다. 입 밖으로 내뱉는 이는 없지만 공기 중에는 단 하나의 질문이 부유한다.
이번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살아남았는가.
지수는 이 분위기가 썩 내키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이것은 인류가 고안한 의식 중 가장 세련되게 포장된 폭력이었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같은 시각, 같은 화면을 열고 누군가의 희비를 실시간으로 난도질하는 광경. 지수는 로마 귀족들이 검투사의 목숨을 손가락 하나로 결정하던 그 오만한 잔인함을 21세기의 사무실에서 느꼈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고대의 검투사들은 자의로 모래판에 섰지만 직장인들은 생존을 위해 강제로 등 떠밀려 나왔다는 것뿐이다.
지수는 평소에 먹던 에스프레소 머신 대신 필터 커피 버튼을 눌렀다. 오늘따라 진한 커피보다 구수하고 오래 숙성된 듯한 원두 향을 느끼고 싶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이 끌어오르자마자 지수는 서둘러 텀블러에 커피를 부었다. 뜨거운 김이 얼굴을 덮고 안경알을 뿌옇게 흐렸지만 닦지 않았다. 그런 소모적인 일을, 오늘은 왠일인지 하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화면을 켜자 어제 작업하던 하반기 예산안 엑셀 파일이 열렸다. 지수는 무의미한 숫자를 들여다보는 척하며 주변의 소음과 진동에 감각을 집중했다. 보지 않아도 읽히는 전황이 있었다.
박서연 과장은 아침부터 유미나 과장과 붙어 앉아 무언가를 끊임없이 속닥였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어조 끝에는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묻어났다. 마치 이미 승전보를 받아 든 장군처럼 당당했다. 반면 막내 최다인 주임은 5분 간격으로 오윤아의 자리를 힐끗거렸다. 그 눈빛에는 걱정과 기대,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오윤아는 평소보다 30분 일찍 출근해 있었다. 그녀의 책상 위는 결벽증 환자의 그것처럼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허리를 곧게 편 그녀의 자세는 지나치게 반듯했다. 평온을 연기하려는 자 특유의 과잉된 단정함. 지수는 그 뒷모습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의 위태함을 느꼈다. 조금만 건드려도 끊어질 듯한, 당장이라도 비명같은 소리를 내며 끊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균형이었다.
9시 58분.
사무실의 고요가 정점에 달했다. 가습기 돌아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릴 정도였다.
10시 정각.
사내 메신저 상단에 붉은 점과 함께 공지 팝업이 떴다.
지수는 습관적으로 예산안 파일을 저장한 뒤 창을 전환했다. 승진에 목을 매지 않는다고 해서 명단을 외면하는 건 전략적 태만이 아니었다. 정보는 감정과 무관하게 수집되어야 한다. 《손자병법》의 구절처럼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은 법이다. 적을 모르면 운에 기대어 일승일패를 반복하고, 적도 나도 모르면 매 판이 패배로 끝난다. 지수에게 명단 확인은 승패의 확인이 아니라 '사내 역학 지도의 업데이트'였다.
하반기 승진자 명단은 짧았다. 전략기획팀 차장 1명, 영업팀 과장 2명. 그리고 가장 마지막 줄.
[마케팅팀 차장 승진 : 박서연]
지수의 눈동자가 명단 끝에서 잠시 멈췄다.
0.5초간의 정적. 그리고 박서연의 자리 부근에서 유미나 과장의 날카로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언니! 축하해요! 세상에, 진짜 됐어!”
그 비명을 신호탄으로 정적은 산산조각 났다. 팀원들이 박서연의 자리로 몰려들었다. "역시 서연 과장님일 줄 알았다", "이번 프로젝트 고생 많으셨다"는 식의 입에 발린 축하들이 꽃가루처럼 뿌려졌다. 강태준 팀장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보냈다.
지수는 그 소란의 중심을 보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오윤아를 보았다.
오윤아는 여전히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표정이 없었다. 분노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저 그곳에 없는 사람처럼 투명해진 얼굴이었다. 지수는 그 얼굴이 눈물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 입술을 깨물거나 주먹을 쥐는 사람은 아직 싸울 의지가 남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오윤아의 눈은 텅 빈 극장처럼 고요했다. 무언가 소중한 것이 안쪽에서부터 영구히 소멸해버린 사람의 얼굴이었다.
지수는 식어버린 커피를 들이켰다. 혀끝에 남은 쓴맛이 평소보다 훨씬 고약했다.
그날 오후, 마케팅팀에는 박서연의 골든벨을 기대하는 축제 분위기가 형성됐다. 강태준 팀장은 “오늘은 좋은 날이니 다 같이 저녁이나 하자”며 사실상의 강제 소집령을 내렸다.
하지만 지수는 단호하게 짐을 쌌다.
“지수 씨, 오늘 빠지게? 서연 언니 차장 승진 날인데.”
유미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지수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오래전에 잡아둔 가족 행사가 있어서요. 어제 미리 말씀 못 드려 죄송하네요.”
거짓말이었다. 지수는 오늘 집 근처의 어두운 와인 바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것이다. 피노 누아 한 잔을 주문하고 가방 속에서 《초한지》를 꺼내 읽을 것이다.
지수는 슬쩍 윤아의 자리를 봤다. 그녀는 이미 퇴근을 하고 없었다. 마치 조용히 피해줄테니 승리한 자들끼리 만찬을 즐기라는 듯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깨끗이 정돈된 자리였다.
하지만 지수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수는 몇 페이지 읽지도 못하고 책장을 덮어야 했다.
오윤아의 그 텅 빈 표정이 자꾸만 활자 위를 덮쳤기 때문이다.
사면초가(四面楚歌)의 밤, 초나라 노래가 들려오자 항우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천하를 호령하던 패왕이 자신의 패배가 무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사람을 잃었기 때문임을 깨닫는 순간의 참담함. 오윤아는 항우 같은 영웅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마주한 참담함의 본질은 같았다. 조직이라는 전장에서 실력이라는 방패 하나만 믿고 세력이라는 진지를 구축하지 않은 자의 결말은 언제나 예정되어 있었다.
지수는 와인 잔을 돌리며 자문했다. 나는 현명했어, 그래 잘했어. 처음부터 전장에 발을 담그지 않았으니 잃을 명예도, 배신당할 기대도 없다. 이것은 승률 100%의 유일한 전략이다. 분명히 그렇다. 그런데 왜 와인의 끝맛이 이토록 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흘이 지났다.
오윤아는 기계적인 성실함으로 자리를 지켰다. 제시간에 출근해 제시간에 퇴근했고, 업무 요청에는 군더더기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지수는 알고 있었다. 상처를 내색하지 않는 사람은 두 종류뿐이다. 상처가 없거나 혹은 상처가 너무 깊어 이미 감각이 마비되었거나.
목요일 밤 11시 14분. 지수의 휴대폰 진동이 정적을 깼다. 발신인은 오윤아였다.
“지수야, 나야. 자고 있었어?”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호칭도 대리님도 아닌 지수야. 유리알처럼 맑고 단정하던 톤이 아니라 술기운 혹은 피로감에 젖어 눅눅하게 젖은 소리였다. 지수는 읽던 책을 덮고 침대 맡에 앉았다.
“아니요, 깨 있었어요. 과장님, 무슨 일이에요?”
수화기 너머로 한참 동안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이어진 오윤아의 낮은 웃음소리. 그것은 차라리 마른 흐느낌에 가까웠다.
“그냥… 그냥 누군가한테 말하고 싶어서. 지수야, 나 요즘 회사 다니면서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어.”
“어떤 생각이요?”
오윤아는 대답 대신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뱉어내려는 말과 삼키려는 의지가 부딪히는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착하게 살면 안 되는 것 같아. 아니, 정직하게 일만 하면 안 되는 거였나봐.”
지수는 그 말을 냉정하게 차단하려 했다. 그것은 패배자가 술기운에 내뱉는 흔한 변명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건 너가 부족한 탓이지. 그러니까 뭘 그렇게 회사 일에 인생을 걸어? 회사가 널 그렇게 쉽게 인정해 줄 줄 알았어? 세상이 널 그렇게 빨리 알아볼 줄 알았어? 사람들이 널, 내가 언니 당신을!!
“오늘 술 많이 드셨나 봐요. 어디예요? 혼자예요?”
“응, 집이야. 걱정하지 마. 그냥 좀… 억울해서 그래. 지수 너는 항상 내 얘기를 묵묵히 들어줬으니까, 오늘도 그냥 들어주길 바랐어.”
지수는 끝까지 직함을 고수했다. 지수야 라는 말에 언니 라는 대답을 원하는 마음이 담겨있었지만 단호히 선을 그었다. 대신 직감했다. 여기서 뭔가를 더 물어야 한다고. 그녀가 승진에 실패한 이유, 승진 명단 이면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지수는 익숙한 관망자의 자세를 취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오늘은 푹 주무세요.”
“그래… 고마워. 자야지. 잘 자, 지수야.”
지수는 전화를 끊고 천장의 불빛을 응시했다. 창밖으로 밤바람이 거칠게 불었지만 집 안은 평화로웠다. 지수는 자신의 평화가 지켜졌음에 안도하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오전까지도, 오윤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출근 시간이 30분이 지나도록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뷰티코리아 10년 근속 중 단 한 번의 지각도 없던 그녀였다. 사람들은 연차를 썼거나 몸이 안 좋은가 보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점심시간 무렵, 인사팀 차장이 마케팅팀 회의실로 강태준 팀장을 불러냈다.
유리창 너머로 팀장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가 이내 창백하게 질리는 과정을 지수는 지켜보았다.
지수는 작업 중이던 파일을 저장하고 마우스를 내려놓았다.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예민한 불안감과 얼음 조각 같은 한기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오후 2시, 자리에 돌아온 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공지했다.
“오 과장님이… 개인 사정으로 당분간 자리를 비우게 됐어요. 오늘 업무는 파트장들이 나눠서 맡도록.”
지수는 '개인 사정'이라는 단어에 설명할 수 없는, 혹은 설명해서는 안 되는 비극이 가려져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날 저녁, 오윤아의 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윤아가 지수의 번호를 자신의 비상연락망에 저장해두었으며, 그것이 회사 동료 중 유일한 번호였다는 사실을, 지수는 전화를 받고서야 알았다. 지수가 외면했던 그 11시 14분의 통화는 오윤아가 세상에 던진 마지막 신호였다.
현실 원칙 #2
조직에서 탈락은 성적표가 아니다
승진 명단에서 당신의 이름이 누락된 것은 실력의 부족이 아닐 확률이 높다. 누군가 당신의 성적표를 의도적으로 바꿔치기했거나, 당신이 점수 외의 게임—정치와 세력과 줄타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조직에서 '공정한 평가'란 시스템이 아니라 편향된 인간이 집행한다.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이에게 공정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에만 합리적이다. 실력은 입장권일 뿐, 당첨권이 된 적은 없다. 이 냉혹한 진실을 아는 것은 비관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맨몸으로 서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 기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