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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da Aug 09. 2022

사랑의 행위

시간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

찝찝한 마음들이 아이의 장난감과 함께 바닥을 굴러다니는 날들을 보냈다. 흐트러진 상태가 되려 정리된 모습인 듯 한 달 사이 그렇게 지냈다. 곤히 잠든 사랑스러운 아이의 볼에 입맞춤을 하고 몸을 일으켜 세워 건넌방으로 들어와 노트북의 전원을 켠다. 아마도 아이의 귀여운 장난감들과 함께 나의 굴러다니는 마음 뭉치들을 가지런히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사랑의 행위다.


엄마들은 아마도 공감하지 않을까.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고, 아이가 금세 자라 있다고, 그냥 나로서의 시간도 조금 갖고 싶다고, 시간아 조금 천천히 흘려주면 안 되겠니...! 아이와 하루를 같이 보내면 해뜨기 무섭게 노을이 지고 어두워진다. 아이의 낮잠 시간과 밤잠을 재우고 하루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두서너 시간이 아마도 그저 나로서의 시간이다. 엄마라는 직업을 가진 '나'는 '그저 나'로서의 이 두세 시간을 충분하다, 이마저도 감사하다 생각한다. 내일은 어떤 반찬을 만들까? 비가 오네, 집에서 아이와 어떻게 지낼까? 어린이집 상담 날짜를 다시 잡아야 하잖아? 곧 추석이구나, 시댁에 전화 안 한 지 좀 됐네? 적금 만기 된 돈을 어떻게 굴려볼까? 세탁기는 내일 돌리면 되겠지? 이러한 나의 시간표를 애써 잊고 마치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멈춰 서서 건넌방으로 들어간다. '나를 사랑하는 시간'에서 더 확장된 어떤 존재에 대한 몰입의 시간으로써의 사랑의 행위다.


오랜 시간을 들여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물론 나부터 들여다보지만 어떤 경계가 무너지면 나와 관계된 모든 것들을 들여다보게 된다. 부지런히 성장하는 어여쁜 아이, 매일같이 수고하는 묵묵한 가장인 남편, 멀리서 응원해주는 언제나 내편인 가족들, 지구 반대편에 사는 둘도 없는 든든한 내 친구, 다녔던 직장에서의 일들, 홀로 뜨겁게 사랑했던 그대, 대학시절의 기억들, 스치듯 안녕했던 누군가, 오늘 봤지만 다 보지 못한 영화의 잔상, 읽고 있는 책에서의 메시지, 이메일 정기구독에서 보내온 인상 깊은 이야기, 억수같이 쏟아지는 여름의 비... 이러한 것들을 들여다보면 결국엔 사랑하는 마음만 남아 몰입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한 나의 몰입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마도 글을 써 내려가는 순간이지 않을까. 마냥 재미있고 즐겁고 쉽지만은 않지만 그 속에서의 나는 시간을 멈춰두고 사랑을 나눈다.


살아가면서 영원의 시간으로 입장했던 순간들을 몇 장면 떠올려본다.

#. 아주 추었던 겨울, 카페에서 Damien Rice의 delicate.

아주 추웠던 겨울, 두 볼이 발개질 정도로 오랜 산책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카페에 들어갔다. 갓 내린 핸드드립 커피를 건네주며 또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다 기타를 꺼내 들어 Damien Rice의 delicate를 연주해 주었다. 그 추웠던 겨울이 한 여름 같았다.

#. 발레.

오랜 기간을 두고 성인반 발레를 배웠었다. 자기 일에 열정적이었던 박정윤 선생님과 함께 서너 명의 내 나아 또래의 사람들과 꽤 열심히 배웠다. 더 정확한 동작을 하고 싶어 도서관에 가서 발레와 관련된 책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하나의 작품을 연습할 단계였는데, 음악에 맞춰 강도 높은 발레 동작을 할 때 간혹 나도 모르는 감정에 휩싸여 눈물이 흘렀다. 그 기억이 너무도 선명하다.

#. 딸이 주는 깊은 위로.

돌 즈음 아기는 나와 얼굴이 마주치는 때마다 내 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도 아이에게 말없이 환한 미소로 응답했다. 너는 왜 나에게 매번 웃어주는가. 바깥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엔 자주 아기는 잠이 들었다. 그럼 아기띠를 한 채로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내 품에 꼭 안겨 잠든 아기. 아기가 건네주는 품이 되려 내게 깊고도 깊은 위로를 주었다.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뜨거운 감정이 올라왔다. 아기와 나, 오직 두 사람만 있는 세상. 그 어떤 언어도 필요 없이 대화한다. 1년간 모유 수유하며 낮과 밤의 경계를 잊어버리고 아이와 한 몸이 되어 지냈던 그 시간들은 타임캡슐에 영원히 존재하리라.

#. 말 그대로 '사랑'.

20대에 열렬히 짝사랑했던 사람을 만났다. 진심으로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소중히 잘 간직하고 있으면 이렇게 만나 지는구나... 함께 저녁 먹고 차 마시고 가볍게 술 한잔, 그리고 길을 걸으며 내내 이야기를 나눴다. 나의 시간은 온전히 멈춰지고 그 사람에게 집중하면서 내 에너지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다.


또 하나의 하루를 시작하듯 방으로 들어와 모든 것을 잠시 잊고 노트북을 켜 글을 써 내려가는 일, 나의 시간을 멈추고 사랑하는 대상에게 집중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들은 모두 의지를 갖고 해 나가는 사랑의 행위다.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2, 30대의 터널을 지나 이젠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세상을 살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그 안에서 자유를 상상해 봐도 좋을 것 같다. '모든 개인은 그 사람의 정치적 주장보다 더 복잡한 존재라는 걸 기억한다'는 어느 작가의 문장을 떠올린다. 나 또한 이 문장에 공감하며 좀 더 풍요롭게 삶을 살아보고도 싶다. 이것이 진실로 사랑을 나누는 일이지 않을까.


바에 마주 보고 앉아 그가 고민을 말했다. '나는 돌아갈 수 있다면 훨씬 젊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늙는 게 싫어.' 그에게 꽤 오래된 드라마의 마지막 회 내레이션을 들려주고 싶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왜 나는 지금껏 그들이 끝없이 죽음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지난날 자신들의 삶을 열심히 살아온 것처럼 어차피 처음에 왔던 그곳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거라면, 그 길도 초라하지 않게 가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너무도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아내고 있 

 는데... 다만 소원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좀 더 오래가길,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게 조금 더 오래가길!"


비가 내리는 곳과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을 나누는 그 알 수 없는 경계에 내 몸을 정확히 두어 본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오래도록 사랑할 순간들을 많이 만들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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