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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da Jun 01. 2023

어느 날 스스로 깨닫는 일

내 결점 너머에 존재하는 나를 바라본 순간.

2023년 5월이 끝났다.


6월에 접어들었다. 습기 가득 머금은 대기의 냄새, 여름잎 우거진 오래된 나무와 바닥의 풀들 사이에서 풍겨져 나오는 초록의 냄새, 움직임이 많아지면 어김없이 콧등과 겨드랑이에서부터 금세 땀이 나기 시작하는 여름이다. 장마의 꿈꿈 함도 그리 싫어하지 않고 뜨거운 볕이 좋아 선크림을 바르지 않아 타버린 살갗도 좋아한다. 여름이 한창인 8월에 태어난 나는 여전히 뜨거운 여름을 좋아하는구나.


올 1월부터 정기구독하며 듣는 오디오 매거진이 있다.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이 갖고 있는 삶의 다양한 관심사 중 하나를 그 달의 큰 주제로 잡고서 5개의 에피소드로 4시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이야기한다. 5월의 주제는 '외로움에 대한 실존주의의 응답'이다. 이번달의 맨 마지막 에피소드인 '스페어타이어'를 산책하면서, 버스와 지하철을 타면서, 설거지 하면서, 청소하면서, 빨래를 개면서 반복해서 수차례 들었는데, 정희진 편집장의 이야기가 나에 대한 어떤 부분을 진실로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에게 '진실하다'거나 '깨닫는다'라는 표현을 최근에는 잘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몸에서 약간의 짜릿함을 느끼면서 깨닫는 경험을 어쩌면 처음으로 한 것 같다.         


스페어타이어-'외로움에 대한 실존주의의 응답'에서 편집장이 내게 건넨 이야기는 이렇다. "실존주의는 내가 경험한 과거의 어떤 일들(내 안의 어린아이, 과거의 트라우마, 부모와의 관계, 20대에 경험한 일 등)에 대해 생각하는 건 중요하지 않거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쪽으로 생각을 몰아가면 한이 없으므로, 그 대신에 현재의 내 상태를 직면하고 내가 내 존재를 스스로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 한이 없는 이야기를, 한이 없는 생각들을 한없이 했다. 10대의 재랄 맞았던 사춘기 시절, 20대에 했던 끝이 없을 것 같았던 방황, 행복했지만 또 고통스러웠던 직장생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에 대한 변함없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 나의 심연에 슬픔이라는 감정의 모래알들이 가라앉아 있다가 어떤 사건이 몰아치면 그 모래알들이 일제히 일어나 내 안을 헤엄쳐 다녔다. 그래도 지금의 나는 살아있다. 그저 한 가정의 주부로서도, 엄마로서도, 그냥 나로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별것 아니지만 '그럭저럭 잘 살아낼 수 있었던 내 안의 그 힘'을 오디오 매거진을 듣다 일깨우게 된 것이다. 현재 내 상태, 내 내면으로 들어가 내 존재를 스스로 지속시킬 수 있는 힘. 그 힘이 내 안에도 있구나라는 사실을 짜릿해하며 깨닫게 되었다. 그 짜릿한 기분을 5월 내내 갖고 있으려 노력했다.


멍하니 생각하고, 일기를 쓰고, 산책하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늘 듣던 음악을 듣고, 글을 쓰고, 심신과 집안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것이 내가 갖고 있는 오래된 일들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가진 본연의 생기와 힘을 느끼게 해주는 일상이다. 일상적인 호흡에 주의를 기울였던 나만의 애쓰지 않았던 작은 노력들이었다.


엄마의 은하수 책모임의 예지 작가님은 내가 '힘을 지닌 아름다운 사람이고 좋은 날로 갈 거라 믿는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고유글방에서 고수리 작가님을 뵈었던 첫날  글을 보시고는 '지영 님이 자신의 너머의 것을 보고 있네요'라고 따듯한 미소로 코멘트해주셨다. 그 순간에는 그냥 웃어버리고 말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말을 믿어도 될 것 같다. 내 결점 너머에 존재하는 나를 바라보려 할 때에 나의 행복을 빌어줄 따뜻한 빛을, 때론 한 여름의 뜨거운 빛도 즐거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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